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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은 지금 '박항서 앓이' 중

입력 2018.01.21. 14:36 댓글 0개

【서울=뉴시스】권혁진 기자 = 업무차 베트남에 머물고 있는 직장인 신동관(36)씨는 20일 밤 무심코 택시에 올랐다가 엄청난 차량 대열에 휩싸였다. 평소 한 번도 접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엄청난 체증에도 짜증 내는 이가 없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운전자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베트남이 축구로 들끓고 있다. 2018 아시아축구연맹(AFC) U-23(23세 이하) 챔피언십에 출전한 젊은 선수들의 선전은 베트남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있다. 대회 직전까지만 해도 베트남의 선전을 예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우승후보 한국과 호주, A대표팀 선수들이 포진된 시리아 틈에서 아시아 변방으로 분류되던 베트남은 1승 제물일 뿐이었다.

베트남은 한국과의 첫 경기(1-2 패배)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만만치 않은 기량을 뽐냈다. 2차전에서는 후반 27분 결승골로 호주를 넘었다. 시리아와 0-0 무승부를 이끌어내며 8강 토너먼트에 합류했다.

20일 이라크전은 달라진 베트남 축구의 축소판이었다. 선수들은 이라크 선수들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연장 전반 4분 만에 역전골을 헌납했지만 연장 후반 두 골을 몰아내며 승부를 뒤집었다. 승부차기에서는 5명의 키커가 모두 골을 넣었다. 쿡 찌르면 와르르 무너졌던 과거와는 분명 달랐다. 동남아시아팀이 이 대회 4강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계 최대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에 게재된 영상들에서 베트남 현지 열기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식당과 거리에 모여 한마음으로 선수들을 응원하고, 경기 종료 후에는 흥을 이기지 못한 팬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숨 죽인 채 승부차기를 지켜보다가 일제히 환호하는 장면은 16년 전 한일월드컵에서 우리가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

축구 변방 베트남을 아시아 중심으로 이동 시킨 이는 박항서 전 한국 축구대표팀 코치다. 박 감독은 지난해 10월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철학 그리고 열정을 쏟아 붓겠다"며 베트남에 입성했다. 그리고 불과 3개월 만에 결과물을 내놓으며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베트남 언론들은 앞 다퉈 박 감독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교체 선수의 동점골과 상황에 따른 전술 변화 등을 칭찬하는 내용이 대다수다. 97세 어머니와 아내를 한국에 두고 베트남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내용과 박 감독이 홀로 라커룸에 남아 눈물을 훔쳤다는 내용의 기사도 눈에 띈다.

박 감독이 이라크를 넘고 기자회견장에 들어서자 베트남 취재진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박 감독은 환대에 "경기 전 선수들에게 '우리가 특별한 것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땅히 받아야 할 결과를 위해 노력했다"면서 "팬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베트남 축구협회와 우리팀을 지원해 준 모든 이들께 고마움을 전한다"고 화답했다.

베트남은 오는 23일 카타르와 결승 진출을 놓고 다툰다. 엄청난 성과에도 늘 배고프다던 거스 히딩크 전 감독처럼 박 감독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얻은 것을 즐기고 싶다. 기적이 계속되든, 아니든 기다려보다. 하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무언가 얻으려 하는 것은 확실하다."

hjkwo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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