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영화

입력 2018.01.16. 16:08 수정 2018.01.17. 08:42 댓글 0개
최민석의 무등칼럼 무등일보 문화스포츠에디터

‘영화’는 현대인들의 문화생활의 주류를 차지한다.

영화예술이 막 싹을 틔운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진을 연속적으로 찍은 방법이 탐구되면서 영화의 탄생을 예고했다. 1891년에 에디슨과 딕슨은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했으며, 1894년에는 에디슨 제작사가 영화 사업을 시작했다. 1895년에는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라프’를 개발한 후 세계 최초의 대중적인 영화인 ‘기차의 도착’을 상영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영화는 다수의 관객을 동원하는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했다.

영화산업이 발전한 것은 미국이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초창기 영화는 무성영화였지만, 1927년부터 유성영화가 시작되었고, 1935년에는 컬러 영화가 상영됐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영화의 모태는 ‘꿈의 공장’이라 불리는 미국 할리우드에서 생겨났다.

시초는 1939년 처음 개봉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전범으로 평가된다.

빅터 플레밍이 메가폰을 잡고 당대 최고의 스타인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언 리를 캐스팅한 이 작품은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미국 사회의 모순과 흑백갈등, 노예문제를 다룬 수작이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영화산업은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변모했으며, 1970년대에는 생동감 있는 특수 효과를 내기 위해 컴퓨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국 영화의 선구자는 1930년대 아리링을 만든 나운규이다.

작품성과 예술성을 논외로 해도 나운규는 이띵에 영화예술의 씨앗을 뿌린 위대한 예술가였다.

한국영화는 이후 50년대와 60년대 황금기를 맞기도 했으나 군사정권 출범 후 표현의 한계와 시대의 제약으로 정체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상옥 유현목 김호선 이장호 배창호 등 뛰어난 감독과 김승호 최무룡 신성일 정윤희 윤정희 남정임 최민식 송강호 한석규 등 배우들을 필두로 한 영화인들의 노력으로 숱한 발전을 거듭해 왔다.

미국 영화가 주도하던 국내 영화시장의 흐름을 바꾼 것은 98년 개봉한 ‘쉬리’였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주창한 이 작품은 강제규 감독의 야심작으로 대규모 투자와 탄탄한 시나리오, 호화 캐스팅 등으로 분단의 현실을 냉철히 그려낸 호평을 받았다.

9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풍성한 자금과 인력, 투자, 명배우들이 어우러지면서 명작을 쏟아냈다.

600만 관객 돌파를 앞둔 영화 ‘1987’의 반응이 뜨겁다.

영화는 30년 전 꺼낼 수 없었던 이야기를  역사적 시각으로 풀어냈다. 당시 세대들에게는 눈물과 향수를, 젊은이들에게는 오늘 누리는 평화와 행복이 지나간 세대들의 희생의 산물임을 웅변한다.

영화가 진실을 마주할 때 그것은 역사가 된다. 영화와 어우러진 관객의 힘이다. 최민석 문화체육부 부장 backdoor20@nate.com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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