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운명의 80년 5월, 이름없는 시민들과 함께

입력 2018.01.14. 17:32 수정 2018.01.15. 08:30 댓글 0개
영화 '1987' 이 불러낸 광주·전남 烈士들 1'영원한 임' 윤상원 (1950~1980)
양심이 이끄는 대로 살다 옛 도청에서 산화
20년간 써왔던 일기에 가득한 고뇌의 흔적
"편한 삶 살았다" 은행 관두고 노동자의 삶

모교인 전남대 교정에 설치된 고 윤상원 열사 공원의 기념 조형물. 오세옥기자 dk5325@hanmail.net.

국민이 먼저다. 지난 촛불항쟁에 터 잡아 탄생한 문재인 정부의 슬로건이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이같은 평범한 민주주의의 명제를 확인하기 위해 크나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군부타도와 민주화 일정을 요구했던 1980년 5·18광주가 그렇고, 독재타도·호헌철폐를 외친 1987년 6·10항쟁, 2016년 국정농단·적폐청산의 촛불항쟁 과정에서다. 6·10항쟁의 도화선을 그린 영화 ‘1987’이 국민의 공감대를 얻으면서 인기다. 이에 본보는 1980년 5·18과 6·10항쟁을 전후한 군부철권통치시대 5·18학살의 진실을 요구하고, 독재타도·호헌철폐를 외치다 스러져간 광주전남 열사들을 재조명한다. 이들의 희생은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라는 ‘민주주의 묘목’이 자라기까지 밀알이 되었다. 그리고 고귀한 열사들의 희생을 먹고 자란 묘목이 잘 자라기를 기원하는 뜻에서다. 편집자 주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 안에서 계엄군의 흉탄이 몸을 꿰뚫지 않았더라면, 윤상원 열사의 나이는 올해 68세가 된다.

윤 열사는 전남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78년 주택은행에 입사하지만 7개월만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로 돌아와 공장에 위장취업을 한 그는 낮에는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고, 밤이면 ‘들불야학’청년들과 광천동 시민아파트 자취방에서 ‘사람이 사람다운 세상’을 꿈꿨다.

그렇게 낮은 삶을 자처하던 윤 열사는 1980년 5월 골방에 동생을 남겨두고 예비검속을 당한 친구를 찾아 거리로 나갔고 돌아오지 않았다.

대학생들이 끌려가고 학살당하는 광주 시민을 이끌 주체가 없던 그때 운명처럼 윤 열사는 시민군과 함께한다.

처음엔 들불야학 청년들과 함께 전단지를 나누다 시민군의 대변인까지 하게 된 그는 5월 27일 끝내 도청을 나서지 않고 시민들과 운명을 같이했다.

하지만 윤상원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익살 넘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며 의지를 저버리지 못했던 평범한 청년으로 기억한다.

윤상원 7남매의 막내인 윤태원(58)씨도 골방을 나서던 큰형의 마지막 뒷모습을 기억한다.

큰형과는 1978년부터 광천동 시민아파트에서 함께 살았다.

은행을 그만두고 공장에 취업한 큰형이 밤 8시 9시까지 공장에서 일하고 돌아와서도 들불야학 청년들과 책을 읽고 토론하던 모습이 뚜렸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의 주인공이자 5·18 이후 윤상원과 영혼결혼식을 맺게 되는 박기순 열사도 형제의 자취방에 자주 와서 태원씨를 챙겼다.

큰형은 평소 막내에게 “개인의 출세를 위해 사는 것보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이 보람이란다”고 웃으며 말했다.

농가에서 태어난 7남매 중 장남이고, 은행에 취직까지 했던 큰형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것에도 미안했다.

주택은행에 취직했던 것 역시 그동안 편한 삶을 살았다며 세상을 위해 살기 직전, 아버지에게 마지막 효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윤태원씨는 “아버지가 기대를 하시는데 한번도 안보여드리면 불효가 아니겠냐며 큰형은 1년만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었다”면서 “7개월만에 사표를 쓰고 내려오자 아버지는 ‘뭣할라고 그러냐’고 화를 냈지만 형은 제 갈길을 가더라도 동생들은 잘 돌보겠다고 아버지한테 말했다”고 전했다.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가 선물로 준 빨간 일기장을 계기로 시작된 윤상원의 일기에는 79년까지 이어진 그의 고뇌가 담겼다.

15살의 어린 윤상원은 “자기 만족을 위해 공부하기보다 사회에 봉사할 수 있고 보람 있는 생애가 더 훌륭하지 않을까”며 “나의 길을 어떻게 걸을지 모든 것이 과제다”고 남겼다.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던 29살에도 “매일 저녁 9시가 넘어야 퇴근하는 과도한 노동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며 “노동자 자신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밖에 없고 이를 위해 서로 사랑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한결같이 적었다.

윤상원의 선배였던 김상윤 윤상원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윤상원의 이러한 고뇌를 ‘천성’으로 본다.

김 이사장은 “광주에서는 야학을 통해 우회적으로 노동현장에 접근했지만 상원이는 직접 한남플라스틱공장에 취업해 노동자들과 마주했다”며 “어릴때부터 계속된 고뇌 끝에 80년 5월 집회 일선에 있던 이들이 잡혀가며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자 상원이는 결심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주변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더불어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다”라며 “주택은행 근무 전 양동신협서 일할 때도 시장의 가난한 행상인들 모습을 흉내내곤 했는데 애환을 담아낸 따뜻한 풍자로 우리 관심을 환기시켰다”고 돌이켰다.

매년 5월이면 윤 열사를 사무치게 그리는 가족들은 윤 열사의 성격을 알기에, 그가 도청에서 혼자 도망나오지 않을 것이기에 그리움만 짙어진다.

동생 윤정희(65·여)씨는 “계엄군이 도청에 들어오기 전날인 26일 선배 한 명이 오빠를 불러 ‘계엄군이 들어온다니 피하라’고 말했지만 오빠는 ‘사람들이 죽어갈 동안 나는 한 것이 없으니 죽을 지언정 도청에서 돌아가야 한다’며 돌아갔다고 했다”면서 “죽을 것을 알면서도 혼자 살겠다고 도망갈 수 없어 들어간 것이다”고 말했다.

또 “의리가 굉장히 강해서 혼자 편한 것, 옳다고 생각한 것을 양보하지 않았다”며 “5·18때 살았더라도 또다시 민주화를 위해 고난의 길을 걸었을 것”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올해 윤 열사의 아버지 윤석동 옹은 아흔 둘이다.

신장이 좋지 않아 4년째 빛고을전남대병원에서 투석을 받고 있으며 귀가 좋지 않아 필담만 가능하다.

취재진이 윤 옹을 만난 지난 13일 그는 아들의 이야기를 전하러 왔다는 말에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고맙소!” 한마디를 겨우 전했다.

아들의 고집을 끝내 꺾지 못했던 아버지는 몇년 전 “인생이 일생일사(一生日死)인데 상원이는 헛된 죽음은 아닌 것 같구나”고 말했다고 막내아들 태원씨는 전했다.

정희씨는 “얼마 전 이한열 열사 어머니가 영화 1987을 차마 끝까지 못봤다는 뉴스를 접했다”라면서 “우리도 지금까지 전두환이 나오면 TV를 꺼버린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를 들으며 너무 행복했다. 너무 기뻤고, 오빠랑 함께 보고 싶었다”고 윤 열사를 그리워했다. 서충섭기자 zorba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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