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자신이 원하는, 취향에 맞는 영화 볼 수 있을 때 문화 다양성 이야기할 수 있어”

입력 2018.01.12. 09:47 수정 2018.01.12. 10:00 댓글 0개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

㈜인디플러그 대표, 스튜디오 느림보 대표, 전 (사)삼각산 재미난 마을 이사장,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새로 쓴  ‘워낭소리’와 ‘우리학교’ 제작자로 한국영화진흥위원회에서 독립영화 활성화를 위해 추진한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초창기 멤버로  활동하는 등 독립영화 활성화 전반에 참여해왔다. 특히 그는 제작자로는 드믈게 영상편집과 사운드 믹싱 등에서 업계 최고 권위자로 정평이 나 있다. 그가 제작을 맡은 영화는 국내뿐아니라 국제무대의 주요 상을 휩쓸며 독립영화계의 산 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워낭소리’를 비롯해 ‘우리손자 베스트’등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고 ‘7년-그들이 없는 언론’ ‘파란나비’ ‘순천’ 등  100여편이 넘는 영화의 제작과 프로듀싱, 영상편집, 사운드 믹싱에 참여한 전문가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영화를

볼 수 있을  때

우리사회 문화다양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한국영화계가

획일화되고 기획력 없이

흘러가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관객의 힘

◆ 국민 ‘예술 향유 권리’ 침탈  더는 없어야

“블랙리스트 문제는 국민예술 향유 권리를 침탈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문화예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이 최대 피해자입니다. 헌법이 보장한 예술창작을 유린한 국가범죄입니다. 진상을 규명해 다시는 이같은 국가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방지책을 찾아야한다는 점에서 문화예술인이면 당연히 관심 가져야하고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체육관광부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49)은 ‘진상 규명’과 ‘재발방지’를 강조했다.

고 이사장은 “블랙리스트 작품이나 명단이 주로 영화분야이고 그 중에서고 독립영화가 타게팅”이라며 “독립영화가 살아야 상업영화도 성장해갈 수 있고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당사자로 당연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상업영화 중심의, 관객동원(수익)이 기준이 되는 현 한국 상업영화 현상을 ‘롱패딩 문화’에 비유했다.

“겨울 겉옷이 롱패딩만 있는게 아닌데 어느 순간 길거리에 하나둘씩 보이면 유행처럼 모두가 입는, 이를 문화에 비유하자면 어떤 영화가 흥행을 하면 그 영화 봐야할 것 같은 분위기는 개성 있는 사회라고 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어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영화를 볼 수 있을  때 우리사회 문화다양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며 “ 한국영화계가 획일화되고 기획력 없이 흘러가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관객의 힘”강조했다..

그 자신 상업영화 출신으로 성공한 영화인 조디포스터가 최근 한 영국매체와인터뷰에서 “(헐리우드영화가) 당장은 돈벌이가 되겠지만 결국은 전 세계 사람들의 영화 보는 안목을 망칠 것”이라고 비판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한국독립영화계 역사 새로 쓴 이단아

고영재 대표는 한국 독립영화 역사를 새로 쓴 ‘워낭소리’ 제작자로 한국 독립영화계의 역사이자 산 증인이다.

고 이사장은 관객이 몇 만명을 채 넘지 못하던 한국영화계에서 ‘워낭소리’로 300만이라는 기록적인 관객 수를 달성했을 뿐 아니라 이후 다양한 독립영화의 성공과 성장 가능성을 보여줬다.

‘워낭소리’는 대중성 뿐아니라 한국 다큐 최초로 선댄스 영화제 경쟁부분 월드 다큐 후보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것을 비롯해 부산 국제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 상, 상업 비상업 극영화 전체를 통틀어 선정하는 맥스무비 최고작품상 등 국내외에서 14개의 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워낭소리’는 고 이사장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사랑, 역량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제작자는 대중과 접촉점이 없지만 영화 제작의 컨트롤 타워다. 지난해 전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은 헐리우드 제작자 와인스타인이 황제 같은 영향력을 행사한데는 영화계에서 제작자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 이사장은 ‘워낭소리’에 앞서 재일 조선인 학생들을 다룬 다큐 ‘우리학교’(2006)로 10만 기록을 달성하며 한국 독립영화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당시까지 독립영화는 채 몇 만을 넘지 못하던 시절이고 10만은 독립영화 최초의 기록이었다.

‘우리학교’도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을 받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상영관을 잡는데 애로를 겪었다. 작품성을 자신한 고 이사장은 ‘공동체 상영’을 접목했다. 기존 예술전용극장 상영과 함께 마을회관이든 문예회관이든 상영을 원하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필름을 들고 찾아나섰다. 발품과 열정, 작품성은 한국독립영화 최초의 10만 이라는 과객동원을 이끌어냈다.

‘워낭소리’는 물론 ‘농민가’ ‘궤도’ 등 그가 제작과 프로듀싱을 한 작품들은 작품성과 대중성에 모두 성공하며 한국독립영화의 작은 부흥을 일구고 있다. 특히 그는 워낭소리 수익금 수십억원을 독립영화와 시민사회단체에 기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허나 그는 한사코 기부액수도 기부단체를 밝히는 것도 거부했다. “당연한 일이고 그런 일로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워낭소리’에 앞서

재일 조선인 학생들을 다룬

다큐 ‘우리학교’로

10만 기록을 달성하며

한국 독립영화 기록을 갈아치웠다

당시까지 독립영화는

채 몇 만을 넘지 못했고

10만은

독립영화 최초의 기록이었다

◆ 좋은 영화는 질문이 남는 영화

고영재 이사장은 한국 독립영화계에서는 낯선 인물이었다.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의 고영재는 경희대 정경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소위 운동권 학생이었다. 4년 내내 학생운동으로 80년대 격랑의 시대를 보냈다. 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 바람으로 운동권 전체가 몸살을 앓던 시기다. 졸업생 고영재는 군 입대 후 삶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들어섰다. 냉철하게 삶을 돌아본 젊은 고영재는 ‘어떤 일을 해야 후회 없이 의미있는 삶을 살 것인가’를 수없이 고민했다.

그의 주저없는 선택은 ‘영화’였다.

초등시절 ‘스크린 영화’로 맺은 인연은 그의 유년시절과 중고등시절을 관통하는 중요한 친구였다. 지역 극장가에 내걸린 영화를 섭렵하며 조대부고 시절엔 문학반에 가입해 문학청년을 꿈꿨다. 고교시절 학생회장을 할 정도의 리더십도 갖춘 영민한 아들의 진로에  대한 부모님의 결사 반대로 잠시 멀어졌던 영화가 그를 다시 끌어당긴 것이다.

졸업후 ‘영화학교 서울’에서 영화공부를 했다. 실무공부를 위해 유학을 꿈꾸던 고영재는 당시 디지털 장비를 자랑하던 한 대학의 영화학과 대학원에 들어가며 디지털 영상편집과 다양한 실무를 익힌다. 이때부터 그의 숨은 재능이 빛을 발했다. 방대한 영화감상과 독서 등이 어우러지며 그의 영상편집은 서서히 입소문이 났다. 그가 영상편집 스탭으로 참여한 작품들이 국제 무대에서 수상하며 명성은 굳어갔다.

물론 그가 뛰어든 분야는 고민할 것도 없이 영화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독립영화였다. 이후 그는 한국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영상실장으로 독립영화 활성화에 등장한다. 이후 우여곡절에 놓인 두 개의 작품, ‘우리학교’와 ‘워낭소리’로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며 한국독립영화사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고 이사장은 “독립영화는 자본이나 개인의 이익이나 떠나서 가장 원초적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마음껏 하는 것”이라며 “독립영화는 영화의 생명”이라고 강조한다. 한마디로 독립영화란 ‘자본이나 돈벌이 등에 연연하지 않고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좋은 영화란 ‘각자의 삶에 질문을 던지는 영화’, ‘영화가 끝났을 때 질문이 남는 영화’라고 설명한다.

조덕진기자 mole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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