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옹폐지 국상야 (雍蔽之 國傷也)

입력 2018.01.11. 13:05 수정 2018.01.11. 16:43 댓글 0개

사마천(司馬遷)은 중국 한무제(漢武帝) 시대의 역사가다. 그 유명한 사기(史記)를 저술했다. 자는 자장(子長). 기원전 145년 하양 지방에서 한(漢)나라 조정의 태사령(太史令) 을 지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사령은 천문을 관찰하고 달력을 개편하고 국가 대사와 조정 의례를 기록하는 일을 한다. 사마천도 뒤에 태사령에 올랐다.

사마천은 어렸을 적부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같은 책을 줄줄 꿰는 신동이었다. 춘추좌씨전은 기원전 350년 경에 만들어진 책이다. 춘추(春秋)라는 책에 좌씨(左氏)가 주석을 단 것이다. 제국의 흥망성쇠 과정을 기록하고 춘추시대 인간 군상의 모습을 묘사했다.

사마천의 ‘사기’는 온 세상을 통털어 그 보다 정직하고 올바르게 씌여진 역사서를 발견하기 힘들 정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장장 52만 6천500여 자에 달하는 대기록이다. 본기(本記) 12권, 서(書) 8권, 표(表) 10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등 총 130권으로 구성됐다. 옛 신화 시대부터 전한 초기인 기원전 2세기 말 한무제 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뤘다. 본래 명칭은 ‘태사공기(太史公記)’였으나 후한 말에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

사마천의 인생은 그의 역사서 만큼이나 파란만장하다. 흉노족에 투항한 이릉(李陵)이라는 장수를 변호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감옥에 갇힌 사마천은 사형을 피하기 위해 궁형(宮刑)을 택했다. 당시 사형을 면하는 방법은 궁형과 50만전의 벌금을 납부하는 두가지 방법 뿐이었다. 궁형은 거세를 당하는 형벌이다.

사마천이 궁형을 택한 이유는 벌금을 낼만한 여력이 없었던 데다 자신의 뒤를 이어 통사를 집필해달라는 선친의 유언 때문이었다. 사마천은 2년 뒤 사면을 받아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됐다. 중서령은 후궁을 보좌하는 일을 한다. 거세를 당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는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많다. 절치부심(切齒腐心), 와신상담(臥薪嘗膽), 지록위마(指鹿爲馬), 회남의 귤을 회북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의 귤화위지 (橘化爲枳)도 사기에 나오는 명언들이다. 또 옹폐지국상야 (雍蔽之國傷也)라는 말도 있다. ‘옹(雍)’은 물의 흐름을 막는다는 뜻이고 ‘폐(蔽)’는 차단하고 가린다는 뜻이다. 진나라가 무너져버린 원인을 따지는 자리에서 사마천이 한나라 정치사상가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이란 글을 빌려 한 말이다.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의미다. 요즘으로 치면 소통의 부재에 대한 경고다.

2천년도 훨씬 지난 지난해 우리는 불통이 빚어낸 참담한 결과를 목격했다. 옹폐지국상야 (雍蔽之國傷也), 시대를 관통하는 진리다.이종주 논설실장 mdljj@hanmail.net

# 이건어때요?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