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칼럼> 아, 홍범도

입력 2023.09.18. 16:44 수정 2023.09.19. 09:19 댓글 0개
이정우의 우문우답 한국장학재단 이사장/경북대 명예교수

최근 벌어지는 해괴한 일이 한둘이 아닌데 그 중 특히 육사에 설치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이 잘 몰랐다. 내가 초중고 다닐 때는 한국사 교과서에 아예 홍범도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문재인 정부 때 카자흐스탄에서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해와 국립묘지에 모셨고, 육사에 장군의 흉상을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우리 국민이 장군의 이름 석자를 알게 됐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자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한다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홍범도(1868-1943)가 누구인가. 평양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머슴으로 살았다. 물론 학교 문전에도 못 가봤다. 출생 이틀 뒤 모친이 사망했고, 아버지가 동네 젖 동냥을 해서 아들을 키웠다. 아버지마저 홍범도가 9살 때 돌아가셨다. 머슴 일을 오래 하다가 군인으로 들어가 4년간 군인 생활을 했다. 이때 경험이 나중에 독립전쟁 때 큰 도움이 됐다. 그 뒤 황해도 제지공장에 들어가 몇 년 일했고 함경도 삼수, 갑산 지역에서 산포수 생활을 했다. 장군의 사격 실력은 입신의 경지여서 20미터 떨어진 곳에 빈 유리병을 이쪽 방향으로 ㅤㄴㅜㅍ혀놓고 총을 쏘면 총알이 유리병 입구를 통과해 병 바닥을 깨뜨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젊을 때부터 나라 잃은 설움을 잘 알았고, 나라의 독립 쟁취가 평생 삶의 목표였다. 1943년 머나먼 카자흐스탄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조국의 상태를 걱정했다.

젊은 시절 함경도 지역에서 산포수들을 모아 의병 전쟁에 적극 나서 여러 차례 일본 군경과 싸워 이겼다. 블라디보스톡 지역으로 이주해 안중근 의사를 만났다. 1920년 만주의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깨부쉈다. 그해 말 다시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 장군과 협력하여 일본군을 대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 두 개의 승리는 일제 강점기 독립전쟁 3대첩에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멀리 임진왜란, 동학혁명까지 생각할 때 해전의 이순신의 승리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침략자 일본에 대해 거둔 육전에서의 최대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위대한 승리를 거둔 장군이 홍범도다. 나는 몇 년 전 대구 사람 몇몇과 함께 만주 독립투쟁 유적지 방문을 한 적이 있다. 용정의 용두레 우물을 보았고 일송정에 올라 해란강도 바라보았다. 시인 윤동주의 집에도 가보고 묘소도 참배했다. 더불어 봉오동 전적지 기념비, 청산리 대첩 기념비도 방문해 애국선열의 넋을 기린 바 있다.

봉오동, 청산리 대첩 후 장군은 러시아로 가서 독립전쟁을 이어갔으나 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막 성립한 소련 정부는 대한독립군의 무기를 회수하고 소련 군대 속에 편입시켜 지휘를 받으라고 했다. 홍범도 장군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했다. 조선 대표로는 이동휘, 박헌영, 김단야, 여운형, 김규식, 조봉암 등 50여명으로 제일 많았고, 여러 나라를 합쳐 100명 넘는 대표들이 모였다. 일본 대표로 온 저명한 사회주의자 가타야마 센은 특별히 홍범도 장군을 예방하여 존경을 표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이미 홍범도 장군의 명성을 익히 들은 바라 특별히 따로 홍범도 장군을 초청해 봉오동, 청산리 대첩에 대해 질문했다. 장군은 작은 수첩에 적어둔 당시 전투 상황을 보여주면서 설명했고 레닌과 트로츠키는 장군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 자리에서 레닌은 홍범도 장군에게 이름이 새겨진 권총 한 자루, 장교 외투, 그리고 약간의 금화를 선사했다. 장군은 이를 자랑스레 여겨 그 뒤 자주 이 권총을 차고 다녔다. 홍범도 장군은 일본놈들과 싸울 때는 전혀 떨리지 않는데 레닌 앞에 가니 떨리더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레닌은 실제 조선의 독립을 적극 지원했고, 독립운동에 군자금으로 보태쓰라고 금덩어리 몇 개를 조선 대표에게 주었는데 그게 국내 반입 과정에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독립운동 계파간에 서로 의심하고 공격하는 터무니 없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당시 세계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고, 미, 영, 불, 독 등은 서로 많은 식민지를 차지하려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도 일본과 싸우는 약소민족 조선을 응원해준 나라는 소련이 유일했다. 물론 임시정부 활동을 용인해준 중국이 있었으나 중국은 제 코가 석자라 남의 나라 도와줄 형편이 못됐다. 이런 상황에서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것을 트집잡아 흉상을 철거하겠다는 국방부과 육사는 도대체 역사의식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홍범도 장군이 1927년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사실인데 그것은 이념상의 행동이 아니고 소련에 적응해서 살아가기 어려운 동포들의 권유에 따른 동포애의 발로일 뿐이다. 홍범도는 오직 강도 일본 타도밖에 생각하지 않은 열혈 애국자다. 인간적으로 매우 소박, 겸손했고 부하들을 친 동생처럼 사랑했다. 독립운동이 계파간에 분열해 싸울 때에도 싸움을 말리고 통합하려고 동분서주했다. 그는 젊을 때부터 독립운동으로 일제의 체포 대상이었다. 일제는 홍범도를 잡기 위해 그의 부인을 잡아 가두고 모진 고문을 가해 부인은 옥사했다. 장남은 독립전쟁에서 전사했고, 차남은 병사했다. 그는 한 평생을 오직 조국 독립에 바쳤다.

그런데도 홍범도 흉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백선엽 동상을 세운다는 말이 나온다. 백선엽이 누구인가. 그는 일제 강점기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로 창씨개명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누군가. 1932년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도시락 폭탄에 폭사한 일본의 육군 대장이다. 시라카와의 원수를 갚는다고 그의 이름으로 창씨개명하고 간도특설대에 들어가 독립운동가를 잡으러 다녔다. 백선엽은 미 군정 시기에는 장군의 계급장을 달고서도 미군 상사 앞에서 '옛 서'(Yes, Sir)라며 저자세를 보여 옆의 한국 군인들이 창피하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홍범도와 백선엽을 비교해보면 너무나 명명백백하다. 우리 육사 생도들이 누구를 모범으로 삼고 애국심과 군인정신을 길러야 하는지. 이런데도 홍범도 흉상을 철거하려는 국방부는 도대체 어느 나라 국방부인가. 이정우(경북대 명예교수, 전 대통령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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