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파사현정’(破邪顯正)

입력 2017.12.18. 11:07 수정 2017.12.18. 15:36 댓글 0개

“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중략) 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진 신념체계와 가치관이 자신의 내부에서 무너져가는 괴로움의 고백이다. 절대적인 것,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믿고 있던 그 많은 우상의 알맹이를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그 잠을 깨는 괴로움을 주는 것을 사과해야겠다.(중략)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고 리영희(1929-2010) 선생의 ‘우상(偶像)과 이성(理性)’ 서문 중 일부다. 선생이 이 서문을 쓸 당시는 유신독재의 칼날이 시퍼렇던 1977년 9월이었다. 그보다 2년여 뒤 선생은 증보판을 내면서 서문에 “글들이 아직도 적지 않은 독자들의 환영을 받고  또 새로운 독자들에게 읽혀지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이 사회의 가면을 벗지 않은 많은 우상이 버티고 서 있다는 증거”라고 밝혔다.

필자가 ‘우상(偶像)과 이성(理性)’을 처음 만난 것은 책이 나온 지 훨씬 뒤인 대학 1학년 때였다. 1983년 무렵이다. 비슷한 시기에 역시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인과의 대화’도 스무살 대학생의 피를 돌게하고, 불의(不義)한 정권에 대한 공분(公憤)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 세 권의 책은 당연히(?) 금서라는 붉은 딱지가 붙어있었다.

‘우상(偶像)과 이성(理性)’이 세상에 나온 지 벌써 40년이 지났다. 하지만, 우상과 이성의 대결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올 초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우상과 이성의 대결에 정점을 찍었지만, 결코 끝난 게 아니다. 우상의 실체를 꿰뚫어본 국민의 힘으로 빛나는 이성의 승리를 쟁취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우상의 허위가 수없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구속은 ‘이제 하늘을 덮었던 짙은 먹구름의 한 모서리가 뚫리고 희미게나마 밝은 햇빛이 내리비치기 시작했’을 뿐이다. 40년 전 리영희 선생이 박정희 정권 몰락 때 밝혔던 소회가 어쩌면 지금과 똑 들어맞는 지 소름돋을 정도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우상(偶像)과 이성(理性)을 켜켜이 먼지 쌓인 추억의 갈피에서 끄집어내게 한 것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된‘파사현정’(破邪顯正)이다. ‘그릇된 것을 깨뜨려 없애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뜻의 ‘파사현정’은 사(邪)를 물리치고 바른 것을 세우라는 ‘척사입정(斥邪立正)’과 같은 의미다. 확대하면 사필귀정(事必歸正)이고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다.

지난해 ‘강물(백성)이 화가 나면 배(왕)를 뒤집을 수 있다’는 뜻의 ‘군주민수’(君舟民水)을 사자성어로 정해 마치 촛불혁명을 예언이라도 한 듯 했던 교수들이 올해 이 말을 사자성어로 선정했다 하니, 저으기 안심이다. 적폐청산이 제대로 이뤄져야한다는 주문이자 결과를 미리 알려주는 신호 같아서다. 이종주 논설실장 mdljj@hanmail.net

# 이건어때요?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