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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의 더블데이트] '배우 창작자' 나경민·김신록, 삶이 연극에 투영될 때

입력 2017.11.19. 08:59 댓글 0개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배우는 연극에서 가면을 쓴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된다는 쾌감에 휩싸인다. 하지만 '일상의 나'와 '무대 위에서 나'의 경계가 없어진다면 혼란스럽지 않을까.

이경성 연출이 이끄는 연극집단 크리에이티브 바키(VaQi)는 배우의 삶과 가치관을 연극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오는 2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하는 연극 '워킹 홀리데이'는 이 연출과 배우들이 공동창작을 통해 이런 성격의 작업을 극대화했다.

지난 5월부터 9월 사이 이 연출과 배우, 스태프들이 함께 세 차례에 걸쳐 비무장지대(DMZ) 일대 300㎞를 도보로 횡단했다. 극에는 분단의 물리적·심리적 상황을 다양한 감각으로 경험한 배우들의 날 것이 녹아 들어갔다. 이를 통해 DMZ는 정치, 도구화의 영역을 넘어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무엇이 됐다.

배우들의 무대 위 표정, 말투에서 그들이 걸으면서 느낀 감정, 심리 그리고 사유가 그대로 전달됐다. 배우들이 일종의 '배우 창작자'가 된 셈이다. 최근 두산아트센터에서 만난 나경민, 김신록도 그들 중 두 명이었다.

나경민은 2007년 이 연출이 크리에이티브 바키를 창단했을 당시 함께 한 멤버로 2011년 '강남의 역사-우리들의 스펙ˇ태클 대서사시'부터 본격적으로 합류해 활약했다. 김신록은 크리에이티브 바키와 함께 연극계에서 다큐 연극 작업으로 유명한 극단 드림플레이(대표 김재엽) 소속으로 이번에 이 연출과 처음 작업했다.

Q. '워킹홀리데이'는 공동창작 형태로 만들어졌다. 어떤 점이 흥미로웠나?

A. "물론 분단 문제 공유가 우선이었지만, 직접 걸으면서 느낀 사유들을 연극 텍스트 대부분의 구조 안에 담아내고자 했다. 예컨대 함께 걸은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연극화하는 대사가 있다. 아무리 가깝더라도 그 사람의 걷는 모습을 오래 들여다보지 못하는데, 보름 동안 특정한 사람들의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다른 감각들이 느껴지더라. 타인을 바라보는 애정이라고 할까. 도시에서는 규격화된 걸음밖에 보지 못 하지 않나.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걸음으로 환기가 됐다. 신록 씨는 바키와 처음 하는 작업이었지만 지리학과 출신이라 걸을 때 도움을 많이 줬다(웃음)."(나경민)

Q. 걷기라는 체험을 극장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이런 체험이 배우들에게는 어떤 감각, 자극을 줬나. 특히 말없이 객석 뒤편 동선까지 활용해 10바퀴가량 극장 안을 도는 배우들의 모습과 발걸음 소리가 관객에게 독특한 체험을 안겨주더라.

A. "걷기는 비효율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속도 면에서도 그렇고. 효율적이라는 것은 견고한 체제 안에서 경쟁하기에 효율적인 합리성 아닌가. 걷기가 비효율적이다 보니까 걸으면서 생각도 감각도 산만해지더라. 무대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공연은 등장, 퇴장, 무대 뒤에서 효율적인 일을 한다. 근데 '워킹 홀리데이'에서 흐름을 유지하며 걷는 열 바퀴 자체가 스스로 변화되는 과정이었고 그래서 의미가 있었다."(김신록)

"공연에서 말하지 않은 채 여백이 생기는 순간 배우들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처음에는 말없이 걷는 장면에 대해 두려움이 컸다. '지루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무대와 객석 배치도 고민을 많이 했다. 양면, 원형, 삼면, 사면 등 구조를 만드는 실험을 했지. 결국 동선의 서클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객과 심리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관객 역시 그 여백의 시간에 자신만의 걸음을 걷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나경민)

Q. DMZ가 어떤 의미였나?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바뀐 부분이 있나?

A. "군대 생활을 김포에서 강화도로 넘어가는 곳에서 했다. DMZ가 땅이 아니라 강이었던 셈이다. 조수 간만의 차이에 따라 강 폭이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니 DMZ가 물로, 뻘로 시시각각 변화했다. 노를 젓지 않아도 건너편에 가닿을 수 있다. 그 일대가 분단되기 전에는 같은 마을이었다고 하더라. 이번에 도보 횡단은 감각적으로 전혀 다른 경험을 안겼다."(나경민)

"이번에 걷기 전까지만 해도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영화를 통해서만 접했다. '총소리가 콩 굽는 소리와 같았다'는 문학적인 표현으로만 접했지. 걸으면서 군사 시설을 봐도 현실이라기보다 오히려 영화 같았다. '현실을 먼저 매체로 접했구나'는 생각이 들더라. 영화를 보면서 진짜 같다고 한 거지. 분단이라는 것이 너무 거대해 관점을 갖기 힘든 면이 있다. 한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려운 것이지. 하지만 '워킹홀리데이' 같은 작품이, 아즈마 히로키가 책 '약한 연결'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체를 이동시키는 것 자체가, 인터넷 창에 새로운 검색어를 치게 하는, 즉 새로운 의식을 갖게 한다고 생각한다. DMZ를 걸으면서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지'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다. 우리 스마트폰 메신저 방에는 매일 북한 관련 기사가 공유됐다. 그런 기사가 계속 눈에 띄기 시작한 거다."(김신록)

Q. 크리에이티브 바키와 작업은 배우에게 단순히 연기만이 아닌 그 이상의 '플러스알파'를 요구하는 것 같다.

A. "희곡은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배우는 작가가 제시한 세계를 인물을 통해 이해하고 표현하는 일을 주로 한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반면 이번 '워킹홀리데이'와 같은 공동 창작 작업을 할 때는 지금 내가 사는 세계의 어떤 단면을 포착할 것인가, 그 단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그 입장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낼 것인가를 모두 고민해야 한다. 기획 단계에서 큰 소재나 주제가 주어지면 연습 과정은 주로 배우와 연출 그리고 스태프들, 즉 작업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그 소재나 주제에 관해 자신의 관점과 표현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배우 역시 '표현' 이전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재료 수집과 텍스트 창작, 장면 구축 등에 깊숙이 관여한다. 배우가 단순 수행자를 넘어 일부 창작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배우 창작자'라는 용어가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평상시 생각이나 삶의 방식이 드라마에 반영되니까. (세월호 참사를 다룬 크리에이티브 바키의 전작인)'비포 애프터'에는 책임감이 더 들었다."(나경민)

"기존 희곡은 거기에 맞춰 연출의 의도대로 연기하면 된다. 근데 '워킹홀리데이' 같은 공동창작물은 관점을 갖지 않으면 안 되고, 그 관점을 공유해야 한다. 단순히 느낀 것을 설명하는 방식은 힘이 없다. 말이든 이미지든 육화를 해야 한다. 이번에 그런 과정이 힘들었지만 흥미로웠다."(김신록)

Q. 드라마, 영화도 출연했지만 오랜 기간 무대 위에서 꾸준히 연극을 해오고 있다. 지금 배우로서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

"제 연기를 봐주고 코멘트를 해주시는 가까운 언니 배우들이 있다. '워킹홀리데이'에서 '저는'이라고 많이 말하는데 정작 '너라는 사람은 포함이 안 돼 있는 것 같다'고 해주시더라. 아나운서같이 세련되고 지적인 퍼포머 같다는 것이다. 정말 저를 내려놓아, 오히려 더 진실하게 연기하고 싶다. 어느 날 뭔가를 꽉 쥐고 있는 에너지를 뺐더니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김신록)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유명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자기 인정 욕구가 강했다. 박수받는 것 좋아하고, 나를 쳐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현재 가장 고민하는 건 사회 현안에 대해 접촉면을 넓히는 거다. 삶에 쫓기다 보니, 계속 그런 시간이 계속 줄어들지만 중요한 사회 문제가 생길 때마다 현장에 가보려고 한다. 구의역 사고, 강남역 사건의 추모현장 등이다. 지난 겨울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에 대항해 만들어진)광화문 캠핑촌 텐트 지킴이도 했다. 제자들과 동료들을 모아 말이다. 무대에 설 때 언제든 사회 현안에 대한 내 입장과 태도를 분명하게 취하고 싶다. 사유는 깊어가지만 할 말이 없어지는 아이러니에 봉착하고 싶지는 않다. 실천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 계속 고민 중이다."(나경민)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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