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화순 출신 실학자 나경적

입력 2017.10.22. 15:29 수정 2017.10.23. 08:14 댓글 0개

‘실학(實學)’은 ‘실제로 소용되는 참된 학문’이라는 뜻을 지닌다. 중국 송대(宋代)의 정이(程?)가 이 용어를 처음으로 썼다. 주희(朱熹)는 노장사상과 불교를 ‘무용한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며 의 가르침을 실학이라 했다. 송(宋)·명(明)조(朝)의 이학(理學)적 학풍과 달리 인간의 실제 생활을 중시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이라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서구의 과학·기술 수용을 강조하는 반면 비실용적인 성리학을 비판하며 나타난 학문 경향이기도 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실학이라는 용어가 거론됐다. 고려 초기 최승로(崔承老)는 유교를 불교에 견주어 실학이라 일컬었다. 고려말 성리학자들 또한 허무와 적멸에서 진리를 찾는 도교와 불교는 허학이며, 자신들의 학문이 실학임을 강조했다. 이제현(李 齊賢)이 대표적 학자다.

오늘날 실학은 그 전성기인 17~19세기 유학의 새로운 학풍, 사상 조류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조선 후기실학자들 가운데는 이름 석자가 떠르르한 이들이 적지않다. 유형원, 이익,정약용,박지원,홍대용,박제가, 김정희, 최한기 등이 그들이다.

유형원은 조선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려 했던 실학의 비조(鼻祖)다. 경화사족(京華士族·한양에 거주하는 문사권력층) 출신이면서도 은둔(전북 부안)의 개혁가답게 초야에 둥지를 틀고 오래된 조선의 폐단을 바로 잡으려 평생을 노력했다. ‘반계수록(磻溪隧錄)’은 희대의 저서로 당시 국가개혁안의 교과서라 평가받을 정도였다.

이익 역시 평생 학문 연구에 몰두하며 성호사설, 곽우록 등 수많은 저서를 통해 실용적인 학문을 강조했다.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를 남긴 박지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적 실학자다. 다산 정약용은 필설로 다 헤아리기 힘들다. 홍대용은 지전설(地轉設), 무한우주론 등 담대하고 독창적인 이론을 펼친 세계주의자이자 명실상부한 조선의 지성이었다.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뛰어난 학문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제약을 받았던 박제가 또한 결코 그 반열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런 실학자 그룹에 석당(石塘) 나경적(羅景績·1690~1762)이 있었다. 화순에서 태어나 이서면 산사리에서 학문 연구를 하고 실학과 관련한 활동을 벌였다. 홍대용과 함께 천문관측 기구인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해 선 보였다. 자명종(自鳴鐘), 자전수차(自轉水車), 자전마(自轉磨) 등 당시로서는 듣보잡 기례를 만들어 실생활에 활용하기도 했다. ‘남국(南國)의 기사(奇士)’, ‘세상에 드문 기사(奇士)’는 홍대용과 중국 학자 육비(陸飛)가 붙여준 별칭이었다.

화순군과 한국학호남진흥원이 그를 기리는 행사를 갖는다. 오는 27일 예정된 ‘석당 나경적의 실학사상과 문학’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다. 그의 생애와 실학 활동상도 소개된다. 이 지역 출신 자랑스러운 실학자, 나경적을 회고해 볼 뜻깊은 자리가 될 것 같다.김영태논설주간kytmd86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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