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반계수록'이 세상에 드러나다

입력 2017.10.15. 15:53 수정 2017.10.16. 09:14 댓글 0개
김태희 아침시평 다산연구소 소장

올해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경세유표> (1817)를 저술한 지 200주년 되는 해다. 다산은 이 책의 서문에서 재야의 선비가 이런 국가제도 개혁론을 써도 되느냐는 질문을 하면서, 그 선례로 반계 유형원(1622-1673)을 들고 있다. 말을 돌렸지만, 기실 다산은 자신의 저작을 을 잇는 경세서로서 자부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유형원을 실학의 비조(鼻祖)라 일컫는 것은 바로 때문이다. 은 유형원이 전북 부안으로 이사한 31세에 착수하여 49세에 완성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어떻게 씻을 것인가? 근간이 되는 토지제도를 비롯하여, 인재의 양성, 관인의 선발과 운영, 군사제도 등 국가제도 전반에 걸쳐 개혁론을 개진했던 것이다.

그런데 (1670)은 완성된 후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반계의 친구 배상유가 추천했지만, 당시 조정의 위정자들은 오활하다며 저평가하여 방치해버렸다. 저술을 완성한 지 100년 후에야 영조의 명으로 간행되었다(1770). 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결정적 계기는 덕촌 양득중(1665-1742)의 추천이었다(1741).

덕촌 양득중은 누구인가? 그는 1665년에 영암 영계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주목을 받았다. 영광에 귀양살이 와있던 이세필이 찾아오기도 했다. 17세에 박태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30세에 박세채와 남구만의 추천을 받았다. 이후 소론의 영수인 명재 윤증을 찾아가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40세 때였다. 이듬해 공주 덕촌으로 이사하는데, 그의 호가 여기서 왔을 것이다.

그가 왜 영조에게 을 추천했는가? 그것은 그의 실사구시론에서 비롯됐다. 누차 ‘실사구시’를 진언하던 끝에 덕촌이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 한 해 전 상소문에서 을 추천한 것이다.

영조는 덕촌을 신뢰했다. 왕세제 때 처음 만났는데, 그가 꾸밈없고 성실한 사람임을 알았다. 나중에 국왕이 되어 그에게 벼슬을 주고 불러서 만나곤 했다. 이미 덕촌의 나이가 65세였다. 이때 영조에게 말한 것이 바로 ‘실사구시’였다. 영조는 매우 맘에 들어 했다. 이 넉 자를 써서 자신의 편전의 벽에 걸어두도록 했다.

덕촌이 실사구시를 강조했던 것은 심각한 허위의 풍조를 배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진단에 의하면, 언필칭 ‘의리’, ‘사문(斯文)’ 등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무리를 이루어 명리(名利)를 쫓고 권세에 영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의리로써 천하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이다.

덕촌이 을 추천하게 된 배경에는 작고한 스승 명재 윤증의 영향이 컸다. 명재가 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덕촌은 또한 추천의 취지로 제도화의 중요성과 토지제도의 우선순위를 말하고 있다. 바로 그 해답이 이었다. 그래서 영조에게 이 책을 구해 탐독하고 신료들이 토론하여 방책을 강구하면 좋겠다고 권했다.

유형원은 북인계 남인으로 분류된다. 그의 은 소론계인 윤증과 양득중이 인정하여 추천한 이후, 당색을 불문하고 주목을 받게 되었다. 노론계에서는 홍계희를 선구로, 홍대용·박지원·이덕무 등 북학파가 대표적 경세서로 평가했고, 남인계에서는 오광운·이익 등을 이어 정약용이 깊은 영향을 받았다.

최근 유형원 기념사업에 전라북도와 부안군이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음을 느낀다. 다산연구소에서 매년 실학기행으로 전북 부안 우반동의 반계서당에 들른다. 이곳은 의 산실이다. 전에 방문했을 때는 유형원의 역사적 위상을 생각할 때, 유적지 관리가 너무 소홀하지 않나 민망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더니 어느 때부터인가 유적지에 제법 정성을 들이고 있음이 확연해졌다.

그런 연장선에서 지난 주말에 실학학회와 실학박물관의 주최로 서울에서 반계 유형원에 관한 학술대회가 있었다. 이외의 ‘유고(遺稿)’로 연구가 확장되고 유형원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동향에 동감하면서, 이와 함께 이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양득중을 다시 생각해본다. 당색과 사상을 초월한 그의 행위는 그가 평소 주장한 실사구시를 추구한 결과였다.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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