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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폐허 수집가의 책읽기
입력 2021.02.19. 10:08 수정 2021.02.21. 19:27 댓글 0개예술가의 생애는 어떤 손길과 눈빛으로 빚느냐에 따라 다른 형상으로 조각된다. 1830년에 태어난 머이브리지라는 이름은 여느 사진작가들에 비해 낯설다. 그는 기술과 공학을 결합해 연속사진을 촬영하고 동작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활동사진의 역사를 열었던 인물이다. 사진과 더불어 철도, 전신 등 과학기술 문명이 탄생해 다른 역사로 질주하는 시기였다.
작년 가을에 사둔 리베카 솔닛의 '그림자의 강'(김현우 옮김, 창비, 2020)을 결국 한해를 넘기고 나서야 읽게 되었다. 이 책에 드리운 예술가의 '그림자'는 짙고 검푸르다. 사진작가를 조명한 예술비평 에세이라고 단정하기엔 폭이 넓다. 흐르는 강물에서 건져 올린 머이브리지의 작업은 사진에서 영화의 시대로 건너가는 길목을 현상한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제1장. 시공간의 소멸'을 읽다가 그만 멈췄다. 제1장에서 3번 반복되는 한 줄의 문장에서 한 사람의 고단한 생애가 압축해서 전달되었다. "1872년 봄, 한 남자가 말 한 마리의 사진을 찍었다."('그림자의 강', 9쪽, 13쪽, 41쪽) 그 남자는 왜 움직이는 말을 피사체로 선택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책을 다시 덮었다. 그해 봄날 "말 한 마리의 사진"을 찍고 있는 한 남자는 독서가의 시간을 훔치기에 충분했다.
사진은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작업이다. 사진은 시공간의 흐름을 정지하거나 소멸시킨다.
-사랑하는 이의 젊은 얼굴을 시간이 흐른 후에, 심지어 죽음이나 이별로 그 얼굴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도 마치 물건처럼 소유할 수 있었다. (…) 사진은 시간의 강을 멈추게 했지만, 스튜디오에서 강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사진들이 가정으로, 사람들의 호주머니로, 사진첩으로 흘러들었다.(앞의 책, 31-32쪽)
그곳에서 아름답고 고귀한 것들은 죽음의 형식으로 영원을 살아간다. 먼지 덮인 서랍에서 사진작가를 꺼내 읽는 글쓴이의 손은 필름 조각을 다루듯 예민하고 섬세하다. 하지만 나는 제2장으로 바로 넘어가지 못했다. 예술가의 '행적'을 정독할 필요가 있었다. 글쓴이는 제1장의 마지막 문단에서 '그의 행적'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하도록 다음과 같은 안내표지판을 세워두었다. "그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은 지금 우리를 있게 한 선택들을 따라가는 일이다."(앞의 책, 42쪽)
나는 그 표지판을 이렇게 해석했다. 한 사람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풍경을 선택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더없이 신중해야 한다고. 누군가 저 먼 이국의 사진예술가를 그린 책을 읽게 된 이유를 묻는다면 재난으로 가득한 일상이 '선택'한 것이라고 답하고 싶다.
재난의 시대에 독서는 산산조각이 흩어진 폐허 위를 내딛는 발걸음과 흡사하다. 머이브리지를 역사의 퇴적층에서 재발견한 리베카 솔닛은 예술비평가일 뿐만 아니라 국가폭력, 반핵, 인권, 기후변화, 환경운동 등에 참여한 실천적인 지식인이다. 이미 나의 눈길은 1906년에서 2005년에 이르는 거의 100여년 동안 북미에서 발생한 지진, 화재, 폭발, 붕괴, 허리케인 등 대재난의 목록 앞에 도착해 있었다. 리베카 솔닛은 재난의 현장에서 색다른 것들을 발굴해낸다.
잿빛 목소리로 다른 세계로 향하는 좁은문을 연다. "재난과 혁명, 이 두 현상은 연대와 불확실성, 가능성, 평소에 가동되는 체제들의 전복같은 측면들을 공유한다. 다시 말해, 규칙들이 깨지고 많은 문이 열린다."('이 폐허를 응시하라', 정해영 옮김, 펜타그램, 2012, 242-243쪽) 재난으로 인한 위기에서 저항의 연대가 탄생하는 지점을 발견한다. 재난 이후 불평등한 현실, 권위주의에 항거하는 몸짓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새로운 우정과 사랑, 혁명의 공동체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재난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책읽기는 이전보다 더 냉정한 마음을 요구한다. 깨진 조각들을 수집하듯이 책 전체를 정독하기보다는 짧은 문장들에 오래 머무를 때도 많다. 묵혀둘수록 맛있는 책들도 있다. 어떤 책은 시공간의 흐름을 되돌리는 마력을 품고 있다. 책이 준 강렬한 느낌이 손상되지 않도록 그대로 보존하고 싶은 것들도 있다.
"수집가는 사물세계의 인상학자이다."(발터 벤야민, '나의 서재 공개') 이 한문장에 오랫동안 전염된 나는 이 세계를 앓고 있는 책들의 인상을 수집한다. 각각의 책들이 지닌 운명의 행로에 관심을 기울인다.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때에는 페이지를 건너뛰는 과감한 독서가 오히려 위로가 된다.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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