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윤두서를 만나다

입력 2017.09.26. 09:32 수정 2017.09.26. 18:34 댓글 0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는 조선 중기의 학문높은 선비였지만 자신의 초상화 그림으로 더욱 유명하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이다. 해남 녹우당에 보관돼있는 그의 자화상(국보 240호)은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에 바탕을 둔 시대를 뛰어넘는 사실화로 정평이 나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위를 향해 올올이 뻗어올라간 수염이 후인들의 눈길을 사로 잡을 정도다.

17세기에서 18세기로의 전환기에 조선 화풍(畵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선구자적 자리에 위치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 걸작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그린 겸재(謙齋)정선(鄭敾),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더불어 조선의 삼재(三齋)로 불리운다.

전통의 선비 집안 출신답게 학문에 매진해 서인(西人) 득세기였던 숙종 19년(169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남인(南人)신분인 그는 벼슬을 포기하고 남은 일생을 초야에서 학문과 시서화로 보냈다. 그가 서화에 열중해 남긴 그림들은 산수화, 도석인물화, 풍속화, 동물화, 화조화 등 다양하고도 범위가 넓었다. 해남의 종가에는 그의 유묵과 서적들이 고스란히 보존돼있고 유작들은 화첩으로 만들어져 보물(제481호)로 지정됐다. 유작 가운데 목기를 깎는 장면을 담은 ‘선차도(旋車圖)’, ‘돌깨기’와 나물캐는 여인을 그린 ‘채애도(採艾圖)’등의 풍속화가 있다. 농부들의 노동을 주제로 한 그림들로 실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었다. 이들 풍속화는 훗날 김홍도, 신윤복 등에 크게 보급된 18세기 풍속화의 선구적 지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조선 중기 회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원동력은 화보, 서화가의 문집, 이론서 등 방대한 중국 관련서적을 섭렵한 경험에서 비롯됐다. 장남 윤덕희와 손자 윤용도 화업을 계승해 3대가 화가로 이름을 얻은 드문 가문이다.

해남군이 지난 주말 그를 기리는 문화제를 열었다. 우리 미술사 최대 걸작 가운데 하나인 그의 자화상을 중심으로 한 ‘300년전의 윤두서를 만나다’였다. 선생의 고택에서 차와 꽃을 올리는 다례제를 지내고 ‘공재 자화상의 밤’이라는 음악회가 개최됐다. 가야금, 대금 산조를 비롯해 판소리가 어우러지는 공연무대와 지역민 대동한마당도 곁들여졌다. 올해는 공재가 타계(1715년)한지 303주기가 되는 해다. 시(詩)·서(書)·화(畵)에 걸쳐 그가 남긴 각종 유물, 유작들은 후인들의 깊은 관심을 끌었다. 또한 당시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옷깃을 여미고 돌아보게할 만큼 가치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김영태논설주간kytmd86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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