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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곳곳서 암매장' 사실 가능성 높인 계엄군 문건·증언

입력 2017.09.21. 16:01 수정 2017.09.21. 18:50 댓글 0개

【광주=뉴시스】 배동민 기자 = 5·18광주항쟁이 마무리된 뒤 1980년 6월, 계엄군이 광주에서 암매장지 수색 작업을 벌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계엄군이 발굴했다 다시 묻어버린 시신과 일부 공수부대 간부들의 증언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시신 암매장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21일 뉴시스가 입수한 전교사 작전일지(1980년 6월2일 오후 6시40분 작성)에는 20사단 61연대 수색대대가 같은 날 오후 2시30분 주답(주남)마을에서 가매장 예상지역을 수색해 시체 1구를 발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최초에 통일화를 발견 주위를 파본 결과 시체 1구를 발견하였으나 많이 부패되어 더 이상 파보지 못하고 가매장', '시체상태 : 많이 부패 되어 있음'이라는 내용도 첨부돼 있다. 발굴 장소는 '주답(CP1.32854)'로 표기돼 있다.

군이 5·18 이후 광주에서 가매장 예상지역 수색을 벌였으며 시신을 발굴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공식 문건이다.

보고서에 언급된 '주남마을'은 그해 5월23일, 11공수가 마을 앞길을 달리던 소형 버스에 사격을 가해 18명 중 17명을 사살한 곳이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홍금숙씨와 남성 2명이 1차 사격에서 부상을 입고 살아남았지만 공수부대는 홍씨를 제외한 남성들을 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사살한 뒤 암매장했다. 11공수가 암매장한 2명은 6월2일, 주민들의 신고로 광주시가 수습했다.

같은 날 20사단 61연대 수색대대가 발견해 재매장한 시신이 이들 중 한 명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2007년 7월 보고서를 통해 '6월2일 전교사 작전일지에 따르면 이날 주답지역에서 사체 발굴을 시도했으나 사체가 부패해 가매장했다는 보고가 있다. 이 사체가 주남마을 부근에서 발견된 부상자들의 시신인지는 불분명하다'고 판단했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부패가 심해 다시 매장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이 문건의 핵심은 당시 계엄군이 가매장 예상 지역을 수색했고 그 곳에 시신이 있었지만 은폐했다는 것"이라며 "5월23일 사살해 묻은 시신이 열흘 만에 심하게 부패돼 다시 묻었다. 이후 가매장 수색에서 발견된 시신도 똑 같이 처리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1공수 간부들의 증언도 이 같은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5·18 당시 11공수 62대대장이었던 이제원 중령은 1995년 검찰 조사에서 '광주에서 올라와 저의 대대는 국민대에 있고, 다른 대대와 여단은 경희대에 있었는데 여단에서 광주에서 사체를 가매장한 병력들을 전부 차출해 보내라고 해 보낸 사실이 있다'고 말했다.

'광주에서 사체를 가매장한 병력들이 전부 차출돼 다시 광주로 내려가 발굴 작업을 벌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최규진 11공수 62대대 4지역대장은 같은 조사에서 '저희가 국민대에 올라간 것이 5월29일 경인데 그로부터 1주일이 채 못 된 시기였으니 6월초로 기억이 된다. 당시 여단에서 병력들을 전체적으로 인솔하고 광주로 내려갔는데 저의 기억으로는 정원각이 발굴하고 왔다고 저에게 보고를 한 것 같은데 정확한 기억은 없다'고 진술했다.

정원각은 과거사위 보고서에서 주남마을 부상자 2명을 사살한 뒤 암매장한 당사자로 지목돼 있다.

하지만 '발굴하고 왔다'는 정원각 보고의 대상은 이들 2명이 아니었다. 주남마을 암매장 시신은 정원각이나 공수부대가 아닌, 이를 목격한 주민들의 신고로 광주시가 발굴했기 때문이다. 발굴한 암매장 시신이 더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수만 전 회장은 "사실상 암매장이 더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군의 특성상 지시와 보고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라며 "아직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는 군 기록을 모두 공개하고 이에 대한 면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행방불명자들과 관련된 진실이 규명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guggy@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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