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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사라진 시신들···"5·18 암매장 더 있다"

입력 2017.09.19. 11:56 수정 2017.09.19. 16:02 댓글 0개
3·7·11공수 추가 학살 기록·증언에도 시신 발견되지 않아
광주 다시 내려온 공수부대··· 간부들 "가매장지 발굴했다"

【광주=뉴시스】 배동민 기자 = 최근 잇따라 공개된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과 시민들의 '암매장' 증언과 진술 문건은 광주지역 곳곳에서 계엄군의 학살과 암매장이 이뤄졌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특히 3·7·11공수여단이 주둔했던 지역에서 다수의 시신을 목격했다는 증언, 살상과 암매장을 했다는 기록이나 조사 보고서가 존재하지만 아직까지 시신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당시 행방불명자들을 암매장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대한 발굴 작업을 앞두고 전면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3·7·11공수가 자행한 살상과 암매장

19일 현재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해 실제 암매장이 이뤄졌던 곳은 광주교도소 안팎과 주남마을, 전남대 공대 뒷동산, 남구 노대동(또는 송암동) 부근 총 4곳이다. 3·7·11공수가 주둔했던 곳이다.

3공수는 5월21일 오후 광주교도소로 이동하기 전, 전남대학교에서 2~3명을 암매장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80년 5월21일부터 24일까지 주둔했던 광주교도소에서는 계엄군이 철수한 직후 교도소 관사 뒤와 인근 야산에서 모두 11구의 시신이 가매장 또는 암매장 상태로 수습됐다.

7공수와 11공수도 민간인을 살상한 뒤 암매장했다.

7공수는 5월22일 광주 남구 노대동 남저수지 인근에서 광주를 빠져나가는 민간인 4명에게 조준 사격을 했으며 이 중 남성 1명이 머리에 총을 맞아 숨졌다. 공수부대원들은 곧바로 현장 주변에 이 남자를 암매장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 2001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당시 총을 쏜 공수부대원들의 양심 고백을 통해 밝혀졌다.

11공수는 5월23일 광주 동구 월남동 주남마을 앞길을 달리던 소형 버스에 사격을 가해 18명 중 15명을 사살했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홍금숙씨와 남성 2명이 1차 사격에서 부상을 입고 살아남았지만 공수부대는 홍씨를 제외한 남성들을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사살한 뒤 암매장했다.

◇' 기록과 증언만···사라진 시신들' 추가 암매장 의혹

살상 기록과 시신 목격 등의 증언은 있지만 아직까지 행방이 확인되지 않아, 추가 암매장 의혹을 받고 있는 사건이 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와 보안사 '광주사태 상황보고' 등에 따르면 7공수는 또 5월22일 너릿재 터널 입구에서 화순에서 광주로 넘어오던 2.5t 트럭에 총을 쏴 1명을 사살하고 1명을 연행했다.

하지만 당시 연행자와 사망자의 신원과 행방은 여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를 조사했던 과거사위도 보고서에 '당시 연행자와 사망자의 신원을 파악하려 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같은 날 송암동 분뇨처리장 주변에서는 계엄군이 9구의 시신을 싣고 나주 방면으로 갔다는 증언이 있다.

분뇨처리장 인근에 살았던 김모(당시 58세)씨는 지난 1995년 12월29일 '전두환 등에 대한 내란수괴죄' 관련 검찰 조사에서 '80년 5월21일 밤 집 부근에서 심한 총격전이 있었다. 다음날 22일 송암동 분뇨처리장 인근에 가보니 군인들이 시체 9구를 눕혀놓고 풀을 덮어 놓고 있었다. 군인들이 화물차를 세워놓고 시체를 싣고 담요를 덮더니 남평쪽으로 갔다'고 진술했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이 시신 9구도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조선대와 송암동 부근은 11공수가 주둔했다.

11공수는 이틀 뒤인 5월24일 중학교 1학년 학생 2명, 인근 마을 청년 2명과 주민 4명을 대검으로 찌르고 총을 쏴 살해했다.

이 중 청년과 주민들의 죽음은 11공수가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과 오인 사격전을 벌여 부대원 9명이 사망하고 40여명이 중상을 입자, 이에 격분해 벌인 잔혹한 학살이었다. 이 때문에 추가 사망자 또는 암매장 의혹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광주 다시 내려와 가매장지 발굴 작업" 암매장 더 있다?

단순히 의혹만이 아니다. 11공수 등 계엄군이 다수의 시신을 암매장했을 것으로 보이는 당시 계엄군 간부들의 증언도 있다.

뉴시스가 입수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2007년)의 '면담보고서'에서 김효겸 제11공수 62대대 4지역대 1중대 하사는 '광주에서 철수 후 국민대에 주둔할 때 62대대장 인솔하에 일부 병사들이 보병 복장을 하고 광주로 가서 가매장지 발굴 작업을 전개한 것으로 안다'고 증언했다.

김 하사의 증언 속에서 거론된, 5·18 당시 11공수 62대대장이었던 이제원 중령도 같은 조사에서 '광주에서 올라와 저의 대대는 국민대에 있고, 다른 대대와 여단은 경희대에 있었는데 여단에서 광주에서 사체를 가매장한 병력들을 전부 차출해 보내라고 해 보낸 사실이 있다'고 말했다.

5월 단체는 '광주에서 사체를 가매장한 병력들을 전부 차출'했다는 증언에 주목하며 사실상 또 다른 암매장이 있었다는 방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5·18 당시 김 하사의 직속 상관이었던 최규진 11공수 62대대 4지역대장의 진술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같은 해 5월31일 검찰에서 '정원각'이 광주에 내려간 시기는 어떠하며 사체를 발굴하고 왔다고 하던가요'라는 질문에 '저희가 국민대에 올라간 것이 5월29일 경인데 그로부터 1주일이 채 못 된 시기였으니 6월초로 기억이 된다'라고 답했다.

이어 '당시 여단에서 병력들을 전체적으로 인솔하고 광주로 내려갔는데 저의 기억으로는 정원각이 발굴하고 왔다고 저에게 보고를 한 것 같은데 정확한 기억은 없다'고 진술했다.

정원각은 과거사위 보고서를 통해 주남마을 소형 버스 1차 사격에서 살아남은 부상자 2명을 사살한 뒤 암매장한 당사자로 지목됐다.

하지만 '발굴하고 왔다'는 정원각의 보고는 이들 2명이 아니다. 주남마을 암매장 시신은 정원각이나 공수부대가 아닌, 이를 목격한 주민들에 의해 발굴됐다.

정수만 전 유족회장은 "계엄군 간부들이 사실상 암매장이 더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셈"이라며 "가매장지 발굴 작업 지시가 11공수 외에 다른 부대에도 내려졌는지, 내려와서 어떤 작업을 했는지 등 반드시 군 보고 기록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면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행방불명자들의 소재 파악에 관한 단서가 나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5·18기념재단은 이달 안으로 5·18 당시 암매장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대한 발굴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3공수와 7공수가 주둔했던 곳이다.

3공수 부대원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암매장 약도를 참고, 광주교도소 인근을 먼저 발굴한 뒤 7공수가 주둔했던 제2수원지 상류쪽과 너릿재 인근 도롯가 등도 발굴 작업을 벌일 예정이다.

이 중 너릿재 인근은 유력한 암매장 추정 지역으로 꼽혔던 곳으로 최근 "5·18 직후 대낮에 군인들이 포크레인 등 중장비를 사용해 마대 자루를 묻고 있었으며 자루 밖으로 나와있는 시신의 머리를 봤다"는 제보가 기념재단에 접수됐다.

guggy@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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