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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다시 내려가 가매장지 발굴 작업했다"

입력 2017.09.18. 08:19 수정 2017.09.18. 08:22 댓글 1개
"사실 관계 분명하고 정확한 증언···5·18 암매장 인정"
도청 앞 집단발포···비무장 시민 상대 조준사격 증언도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됐던 제11공수 62대대 4지역대 1중대 소속 김효겸 하사가 5·18민주화운동 이후 광주에서 가매장지 발굴 작업을 전개했다고 증언한 것으로 17일 확인됐다. 사진은 뉴시스가 입수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2007년)의 면담보고서.

【광주=뉴시스】배동민 기자 =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됐던 제11공수부대 간부들이 5·18민주화운동 이후 광주에 다시 내려가 가매장지 발굴 작업을 전개했다고 증언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실상 '5·18 암매장'을 인정한 증언으로,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의 본격적인 조사와 5·18기념재단의 4차 암매장 발굴 조사를 앞두고 이에 대한 진상 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17일 뉴시스가 입수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2007년)의 '면담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염규홍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1과장과 정찬호·노영기 조사관은 김효겸 제11공수 62대대 4지역대 1중대 하사와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한 음식점에서 2시간 가량 면담을 가졌다.

김 하사의 증언은 주남마을 양민학살과 암매장 사건이 주를 이뤘다.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가 자행됐던 1980년 5월21일, 김 하사가 소속된 11공수는 계엄군의 작전이 변경되면서 조선대 뒷산을 따라 철수한 뒤 주남마을 뒷산에서 매복 중이었다.

김 하사는 당시 상황을 '조선대에서 주남마을로 철수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보급품은 헬기로 전달됐고, 4지역대 1중대는 여단 보급 담당이어서 나도 그것을 각 부대에 나르는 역할을 했다'고 자신이 맡았던 임무를 설명했다.

이어 주남마을 학살 이후 상황에 대해 자세히 증언했다.

주남마을 학살은 1980년 5월23일 광주 동구 월남동 주남마을 앞길을 달리던 소형 버스에 공수부대가 사격을 가해 여고생이었던 홍금숙씨를 제외한 17명이 사살된 사건이다. 17명 중 2명은 1차 사격에서 부상을 입고 살아남았지만 공수부대가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사살한 뒤 암매장했다.

김 하사는 '미니버스에 대한 발포는 (11공수 62대대)5지역대에서 했다. 시간은 한낮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주남마을에서 달구지에 부상자 2명과 홍금숙이 동행하는 것을 5지역대 병사로부터 인계받아 여단 헬기장으로 옮겨갔다'고 전했다.

이어 '여단헬기장에서 여단 정보참모와 대대 군수장교를 목격했고 홍금숙은 헬기로 후송되고 부상자들은 후송치 않았다. 4지역대 병사 정원각 중사와 한상천 2명이 부상자 2명을 데리고 가서 사살 후 매장했다'고 증언했다.

김 하사의 증언대로 유일한 생존자였던 홍금숙씨는 헬기로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았으며 매장된 2명의 시신은 주민들의 제보로 주남마을 뒷산에서 발굴됐다. 이들은 총격에 의한 사망자로 밝혀졌다.

사실 관계가 정확한 김 하사의 증언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됐던 제11공수 간부들이 5·18민주화운동 이후 광주에서 가매장지 발굴 작업을 전개했다고 증언한 것으로 17일 확인됐다. 사진은 5·18 당시 11공수 62대대장이었던 이제원 중령의 1995년 6월26일 서울지검 진술 조서 편집본.

김 하사는 '광주에서 철수 후 국민대에 주둔할 때 62대대장 인솔하에 일부 병사들이 보병 복장을 하고 광주로 가서 가매장지 발굴 작업을 전개한 것으로 안다'고 증언했다.

김 하사의 증언 속에서 거론된, 5·18 당시 11공수 62대대장이었던 이제원 중령도 지난 1995년 6월26일 검찰 조사에서 같은 내용을 진술했다.

이 중령은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의 내란 목적 살인죄와 관련,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광주에서 올라와 저의 대대는 국민대에 있고, 다른 대대와 여단은 경희대에 있었는데 여단에서 광주에서 사체를 가매장한 병력들을 전부 차출해 보내라고 해 보낸 사실이 있다'고 말했다.

11공수 간부의 증언은 또 있다.

5·18 당시 김 하사의 직속 상관이었던 최규진 11공수 62대대 4지역대장은 같은 해 5월31일 검찰에서 '정원각(중사)이 광주에 내려간 시기는 어떠하며 사체를 발굴하고 왔다고 하던가요'라는 질문에 '저희가 국민대에 올라간 것이 5월29일 경인데 그로부터 1주일이 채 못 된 시기였으니 6월초로 기억이 된다'라고 답했다.

그는 이어 '당시 여단에서 병력들을 전체적으로 인솔하고 광주로 내려갔는데 저의 기억으로는 정원각이 발굴하고 왔다고 저에게 보고를 한 것 같은데 정확한 기억은 없다'고 진술했다.

이들의 증언은 5·18 때 공수부대가 주남마을 학살 당시 암매장한 2명 외에 적어도 가매장한 광주 시민이 더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정원각 중사'라는 구체적인 이름 등이 언급됐던 만큼 이와 관련된 진상 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김 하사 등의 증언 내용을 살펴보면 주남마을 학살 등 사실 관계가 상당히 정확하고 분명하다. 가매장지 발굴 작업을 전개했다는 증언도 사실로 볼 수 있는 이유"라며 "하지만 발굴 작업 결과는 여태 공개되거나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책임자들은 이미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외에 5·18 당시 계엄군의 과잉 집압 이유와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당시 비무장한 시민을 향해 조준 사격이 이뤄졌다는 증언도 눈길을 끌고 있다.

김 하사는 '광주에서 진압은 이전의 충정훈련 때와는 달리 해산이 아니라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잉진압이 발생했다'고 증언했다.

'5월21일 도청 앞에서 시위대 대열과 맨 앞에서 대치했다. 발포 이전에 시위대의 총은 전혀 보지 못했다. (중략)도청 주변의 화분을 바리게이트 삼아 집단 발포를 했다. 몇몇은 위협사격이었으나 몇몇은 직접 조준 발포했다. 도청에서 조선대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발포는 일체 없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이에 대해 5·18기념재단 관계자는 "계엄군의 직접적인 증언"이라며 "명확한 진상 규명과 5·18 역사 왜곡과 폄훼에 대한 처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5·18기념재단은 5·18 행방불명자(행불자)들을 찾기 위한 네 번째 암매장지 발굴을 올해 안에 추진할 예정이다. 이는 지난 2009년 3월 3차 발굴 이후 8년 만이다.

guggy@newsis.com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됐던 제11공수 간부들이 5·18민주화운동 이후 광주에서 가매장지 발굴 작업을 전개했다고 증언한 것으로 17일 확인됐다. 사진은 5·18 당시 최규진 11공수 62대대 4지역대장의 1995년 5월31일 서울지검 진술 조서 편집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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