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브로드웨이 42번가' 정영주, 설득의 기술
입력 2020.07.05. 13:08 댓글 0개[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도로시 브록'처럼 무대 위에서 여성 배우들이 흔히 꿈꾸는 롤모델을 연기해 본 적이 없어요. 브록을 제가 맡은 것에 대해 설득력을 갖는 것에 부담이 있었는데, 많은 분들이 설득이 됐다면서 제 편이 돼 주셔서 감사했죠."
주로 TV를 통해 감초 조연으로 배우 정영주를 기억한다면,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 브로드웨이 왕년의 스타 '도로시 브록'을 연기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브록의 드라마틱한 삶에 대한 표현력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 거기에 사랑을 찾은 뒤 자신의 역할을 꿰찬 후배를 기꺼이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영주 표 브록에 설득당할 수밖에 없다.
배우는 자신과 캐릭터에 대한 믿음 없이는 무대 위에서 연기할 수도, 노래할 수도, 심지어 걸을 수도 없다. 정영주는 그걸 증명한다. 최근 논현동에서 만난 정영주는 "캐릭터에 밀착이 되는 것은 확신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정영주가 '브로드웨이 42번가'에 출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4년 전 앙상블 오디션에서 노래 한곡을 부르고 탈락했다. 그간 그녀가 이 작품에 출연한다면 웃음을 주는 감초 역인 '메기'를 맡게 될 확률이 크다고 업계 사람들은 생각했다. 제작사인 샘컴퍼니의 김미혜 대표가 정영주에게 브록 역을 제안했을 때 오히려 그녀가 김 대표에게 "괜찮겠어?"라고 되묻기도 했다.
정영주에게는 인물의 결을 섬세하고 풍부하게 만드는 기술이 있다. 무대에서 형성되는 두 개의 관계를 끊임없이 톺아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캐릭터와 캐릭터'의 관계다.
일례로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 브록과 연출가 줄리안 마쉬(송일국·이종혁·양준모)는 서로 팽팽하게 긴장감을 형성하지만 마냥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이런 캐릭터들의 관계를 이해하면서, 상대배우에 대한 존중도 함께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 정영주의 연기론이다.
공연을 위해 돈 많은 스폰서인 장난감기업 사장 에브너 딜런의 비위를 맞추지만, 탭댄스가 곁들여진 쇼뮤지컬 이전의 보드빌 시절부터 사랑을 키워온 가난한 연인 팻 대닝을 여전히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도 마찬가지다. 팻이 가난함에도 멋지게 보이는 것은 브록과 정영주가 그 캐릭터와 배우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브록과 팻이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는 건, 두 캐릭터가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서 무대 위에서 왕 역할이 왕처럼 보이는 건 그가 왕으로서 서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변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왕대접을 해주기 때문이죠."
연기과가 아닌 극작과 출신으로 캐릭터의 이야기를 만들 줄 아는 정영주는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다. '오페라의 유령'의 발레감독 '마담 지리', '빌리 엘리어트'의 발레선생 '윌킨슨', 뮤지컬 '톡식히어로'의 환경을 파괴하는 악당 시장, '고스트'의 괴짜 심령술사 '오다메', '넥스트 투 노멀'에서 아들에 대한 상처를 갖고 있는 '다이애나' 등 비중 있는 역들을 소화해왔다. 특히 2014년에는 연극 '프랑켄슈타인에서 삭발 투혼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난 2018년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국내 초연이 정영주 연기 인생에 큰 분기점이 됐다는 것에 토를 달 사람은 많지 않다.
20세기 스페인 시인 겸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미국 뮤지컬 작곡가 겸 극작가 마이클 존 라키우사가 뮤지컬로 옮긴 작품.
거룩하고 성스러워 보이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다섯 딸들의 뒤틀린 자아와 성적 본능을 통해 암울한 시대 정서를 담아내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담아낸 수작이다. 알바 역의 정영주는 주로 조연상 후보로 오르다 이 작품으로 뮤지컬시상식에서 처음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작품이 전율을 준 또 다른 이유는 정영주를 비롯해 40대부터 20대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여성 배우 10명만 출연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남성 배우에 비해 티켓 파워가 덜하다는 여성 배우만 출연하는 작품이 드물었는데 작품에 대한 호평은 물론, 전석이 매진되며 업계를 들썩였다.
정영주는 이 작품에 깊이 관여했다. 황석정, 이영미, 전성민, 오소연, 정인지를 직접 캐스팅됐다. 우란문화재단에서 김국희와 백은혜를 섭외했고, 오디션을 통해 김환희와 김희어라가 합류하면서 쟁쟁한 라인업이 완성됐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화룡점정은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안은 정영주의 소감이었다. "여배우란 말, 안좋아해요. 그냥 배우! 이 모든 영광을 대한민국에서 여자라는 이름이 아닌 배우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모든 배우들에게 돌리겠습니다."
정영주는 "'베르나르다 알바'는 운명이에요. 생각지도 않았던 기회가 찾아왔죠. 만나는 순간부터 심장이 뛰었어요. 일본에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여성 배우로만 구성된 극단)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이런 것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었죠"라고 털어놓았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내년 1월 정동극장에서 재연한다. 정영주 소속사 브이컴퍼니와 정동극장이 공동 제작하는데, 정영주는 출연할 뿐 아니라 기획, 제작도 맡는다. 지난 시즌에 이어 김성수 음악감독이 함께 하고, 정영주와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를 작업한 연출가 겸 극작가 박해림이 합류한다. 이달 중 오디션을 연다.
황석정, 이영미 등이 정영주의 제안을 받은 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베르나르다 알바'에 합류했을 정도로 그에게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브로드웨이 42번가'에는 제 자식이 3명이 있다"고 언급할 정도로 후배들에 대한 애정도 대단하다.
브로드웨이 스타 빌리 롤러 역의 서경수는 '넥스트 투 노멀'에서 그의 아들 역을 맡았다. 코러스걸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페기 소여 역의 오소연은 '넥스트 투 노멀'과 '베르나르다 알바'에서 그의 딸 역이었다. 또 다른 페기 소여 김환희도 '베르나르다 알바'에서 정영주의 딸 역이었다. 정영주는 "후배들과 다른 작품에서 연이어 만나 한 무대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감이 크다"고 했다.
스스로도 앙상블 생활을 해온 만큼, 앙상블에 대한 애정도 크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재와 이유는 다르지만, 역시 공연을 올리는 것이 쉽지 않은 때인 1930년대 대공황기가 배경인 '브로드웨이 42번가'는 게다가 앙상블들의 이야기다. 앙상블이 합을 맞춰 탭댄스를 추는 장면은 전율을 선사한다.
"브로드웨이 42번가'는 앙상블의 작품이잖아요. 앙상블의 전율을 알고 있는데, 이제 몸도 마음도 앙상블이 안 되는 시기라 더 부럽고 멋있고 보고 있으면 행복해요. 앙상블 친구들은 쉬는 시간에도 쉬지 않아서 '좀 쉬어'라고 소리칠 정도예요. 하하."
정영주는 항상 시대에 앞선 고민을 해왔다. 남성 4중창 팀을 뽑는 JTBC '팬텀싱어'가 최근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정영주는 이미 2006년 문희경, 양꽃님, 김은영과 함께 4인 뮤지컬 그룹 '엘 디바'를 결성해 다양한 장르의 무대를 누볐었다.
"'팬텀싱어' 여성 편이 나오지 않을 거란 법은 없잖아요. 여성 4중창 팀이 인기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에요. '베르나르다 알바' 역시 기존 편견을 깼죠. 할 이야기가 있을 때마다 멋지게 노래하고 싶어요." '브로드웨이 42번가', 8월23일까지 샤롯데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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