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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통해 본 인공지능의 미래
입력 2017.09.12. 09:46 수정 2017.09.13. 09:18 댓글 0개지난 주말 부모님댁을 방문하니 “언니가 말하는 텔레비전을 사왔다”고 어머니가 흥분하신다.
세계 최초 인공지능TV라고 홍보하며 판매에 들어간 kt의 ‘기가지니 GiGA Genie’ 상품이었다.
셋톱박스에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가지니’를 TV에 연결하면 어떤 TV라도 스마트 인공지능 TV로 만들어준다니, 먼저 출시된 SK텔레콤의 ‘누구(NUGU)’보다 한 단계 진화한 상품이었다. 바로 TV를 틀어보았다.
언니는 이 장비에 ‘지니’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TV 앞에서 “지니야, 오늘 날씨가 어떠니?” “지니야, 교통정보 좀 알려줘.” “지니야, KBS 틀어.” 등 몇 개의 질문과 명령을 던졌다.
‘지니’는 그럭저럭 명령에 따라 대답을 하며 임무를 수행했다. 물론 지니의 목소리는 컴퓨터로 녹음된 전형적인 기계음에 불과했고 멋대가리 없이 대답했으며 조금만 문장이 길어지면 “정보가 입력되어 있지 않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직은 인공지능과 대화한다기보다는 음성으로 기계를 조작한다는 느낌이었다. 몇가지 시연 끝에 나는 지니가 좀 더 똑똑해진 뒤에 사겠다고 결론 내렸다. 아직 초보 단계이기는 하지만 ‘기가지니’라는 이름의 인공지능(AI)은 수많은 SF영화들에서 보았던 일들이 더 이상 상상의 영역이 아닌 현실의 영역으로 들어섰음을 실감하게 한다.
AI를 다룬 영화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파이크 존스의 <그녀 HER>였다.
2013년 개봉한 <그녀>는 <존 말코비치되기>라는 독특한 영화를 만든 할리우드 감독 스파이크 존스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 시어도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력 있게 표현해주는 편지 대필 작가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아내와 이혼한 뒤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외로움에 빠져있다. 어느날 시어도어는 사랑에 빠지는데 그 대상이 인격형 인공지능체계인 ‘사만다’이다.
시어도어는 시스템의 초기설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연령, 젠더, 목소리, 이름 등을 입력해 ‘사만다’라는 존재를 얻는다. 그러니까 사만다는 그의 취향을 반영해 입력된 프로그램이다.
영화는 육체를 지닌 인간들 사이를 연결하며 가짜 감정을 판매하는 시어도어가 정작 육체가 없는 AI와 충만한 감정을 교류하는 아이러니를 다룬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이야기는 그리 새로울 게 없다. 수많은 SF영화들은 이미 AI의 마지막 단계인 감정을 지닌 사이보그에 대해 탁월한 상상력을 펼쳐 왔다. 감정은 언제나 인간성의 최후의 보루로 묘사되었고 AI는 인간 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상상의 수단이었다.
<그녀>의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AI라는 시스템의 진화 방식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엄청난 속도로 정보를 습득하고 처리해가는 사만다는 그 어떤 여성보다 섬세하게 시어도어의 관계에 대한 갈증을 어루만져준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진화하던 그녀의 학습능력은 시어도어가 그녀와의 유일한 관계에서 충만함을 느끼는 순간 수백 명과 동시에 동일한 관계를 맺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마저도 넘어서는 순간이 온다. 이제 그녀는 시어도어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정보의 시공간으로 진입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섬뜩하고 낯선 순간은 미래학이 소위 ‘기술적 특이점 technological singularity’라고 명명한 순간을 장면화 하는 순간이다. ‘기술적 특이점’은 인간이 기술 발전을 이해할 수 있는 한계점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기술적 특이점에 이르면 AI는 엄청난 속도의 자체학습을 통해 지능폭발을 일으키는데, 이 때 인공지능은 인간지능의 총합을 넘어서고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기술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수많은 SF에서 묘사해온 디스토피아의 미래가 시작되는 것이다.
사만다는 선한 인공지능이지만 그녀가 자체진화를 통해 도달할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2029년에 인간과 같은 수준의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2099년에는 가정용 PC 하나가 인류 전체의 두뇌보다 10억배 이상의 지능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그녀>가 이전의 SF와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알파고가 등장하고 ‘기가지니’가 상용화되기 시작한 지금, 기술에 관한 우리의 두려움이 상상의 영역을 넘어 현실의 문제가 되었음을 각성시키기 때문이다. 이 인공지능이 생물학적 인간의 한계를 보완해줄 유용한 존재가 될지, 우리를 통제 불가능한 디스토피아로 이끄는 전령사가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시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이 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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