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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윤한봉과 노무현
입력 2020.06.12. 17:11 수정 2020.06.14. 19:09 댓글 0개요즘 전남대 교직원 게시판인 '여론광장'에서 필자는 뜻하지 않게 DJ유산에 관한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필자가 대학이 13년째 시행중인 '김대중 학술상'과 '김대중의 사상과 리더십' 교양과목 설강이 과연 대학의 이념에 맞는지 의견을 개진하자 반론이 제기되었다. 본 칼럼에서 전남대 현안을 재현할 의도는 추호도 없기 때문에 위 논쟁의 2라운드 주제인 '무등산 노무현길'에 대해 독자들과 논쟁을 이어가고자 한다.
노무현 집권 기간(2003-2008)에 광주시청에서 증심사 지구에 세운 '무등산 노무현길' 기념비 취지문은 이렇다. 노무현 후보는 '만일 대통령에 당선되면 무등산에 오를 것이다'라는 약속을 했는데 16대 대통령에 취임한 2003년도에 증심사-장불재 노선을 등정 하였기에 '무등산 노무현 길'로 제정하고 기념비도 세운다. 근래 이 취지문을 읽어보고 이 길을 수천 번 걸었을 윤한봉을 기념하는 무등산 길은 왜 지정하지 않았을까하는 상념에 빠졌다. 광주의 상징이 무등산인데도 한번 등정한 대통령의 재임 1년차에 재빨리 탑을 증정한 광주시장은 누구이며 의도는 무엇일까?
올해 5·18을 맞아 전남대 교내에 '윤한봉, 김남주, 윤상원, 박관현'민주영령을 추모하는 민주길이 새로 건축되어 수많은 방문객이 용봉골을 찾을 것으로 예측된다. 그런데 윤한봉이 가장 극복하고자 했던 정치인은 동교동계 김대중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의 민주화과정에서 DJ와 운동권은 동상이몽 관계로서 본질적으로 상호 불신의 벽을 넘기 어려웠다. 잠시 시계추를 1985년으로 돌려 미국에서 귀국한 김대중의 5·18 구묘역 참배를 복기해보자.
수만 명의 광주시민들은 밤길을 걸어 5·18 구묘역에서 통곡하는 김대중 선생과 함께 울었다. 이후 1989년 6·29선언까지 DJ와 재야 그리고 학생과 노동운동이 결집한 국민적 에너지가 전두환 독재체제를 무너뜨렸지만 그 정치적 과실은 일방적으로 DJ 독식으로 재편되었다. DJ와 YS 등 정치인들이 기존 독재세력의 온건파와 협약을 체결하고, 아예 정치판을 정치인의 전유물로 만들고자 운동권이 참여할 정치공간을 차단해 버린 것이 '위로부터(from above) 한국민주화'의 특징이다.
김대중의 대선승리 전후의 지역할거체제에서 호남의 재야세력은 DJ로부터 억압과 분할 통치되었다. DJ에게 윤한봉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다. 윤한봉의 정치이념은 순수한 민족통일과 정치적 이상주의라면 DJ 목표는 권력 강화를 통한 정권획득이다. 호남을 이끌어야 될 정치세대인 윤한봉, 김남주, 김영철, 신영일, 노준현 등 인재들은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대선과 지방선거판에서 갈가리 찢어지고 분산되었다. 호남정치에 씌워진 DJ유산의 가장 극명한 피해는 경쟁력을 갖춘 호남 정치인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가신들이 차지한 의원, 자치단체장들은 맹주에 대한 충성경쟁이 우선 사항이니, 전국적 잣대로 차기 대통령 감으로 평가되는 정치인이 자체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더욱 큰 문제점은 DJ이후 시기에도 지역할거체제가 경로 의존되어 아예 호남의 정치풍토로 굳건하게 고착되어갔다. 노무현, 안철수, 그리고 문재인체제에서 정치적 패권자인 맹주와의 종속-복종관계 즉 고객주의(clientelism) 관성이 온통 정치판을 뒤덮고 있다. 그리고 중앙에 예속된 지역 내 그룹이 파워그룹을 형성하여 지역 내 파이의 분배와 정책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난 20대와 21대 총선에서 호남은 1석을 제외하고 전 지역구에서 지역할거정당이 차지했다는 점은 정치적 고객주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패권정당에게 희소식은 호남의 유권자들은 모리스(Morris)가 선진 민주주의 정치문화의 특징으로 묘사한 '비판적 시민'과는 거리가 먼 신민적 정치문화에 가깝다는 점이다. 그러나 호남의 유권자들은 머지않아 낡은 틀을 깨고 비판적 시민으로 발전할 것이다. 헤겔은 한 시대를 해방시켰던 이데아는 시대가 바뀌면 낡은 유물로 퇴화하고 사회발전을 위한 새로운 사상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헤겔의 변증법을 호남에 적용하자면 앞으로 가장 중차대한 정치적 과제는 '제2의 윤한봉'을 키워내려는 사고의 전환일 것이다. 머지않아 '무등산 노무현 길'은 낡은 유물로 떨어질 날이 온다. 미리 무등산의 아들딸들을 제2의 윤한봉으로 키워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 숙명이다. 다음 칼럼에서는 '이낙연은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에 관해 독자와 의견을 나누어볼 것이다. 호남의 최대 약점인 정치인 부재에 대한 시리즈를 계속 쓰고자 한다.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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