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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장자의 ‘혼돈’을 읽다
입력 2017.09.05. 15:34 수정 2017.09.06. 08:27 댓글 0개10일 전, 안철수 국민의당 새 대표가 “정부·여당의 오만과 독선 견제”를 얘기했습니다. 당선소감에서입니다. ‘오만과 독선’-. 이 말은 자유한국당이 문재인 정부 들어 전매특허처럼 사용하고 있는 말 아닌가요. 일종의 프레임이지요.
안철수 대표가 왜 한국당이 사용하는 프레임 언어를 사용했을까 국민들도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행태를 ‘오만과 독선’으로 인식하고 있을까 궁금증이 들어 여론조사를 찾아 보았습니다.
안 대표가 소감을 밝힌 뒷날(8월 28일), 리얼미터가 발표한 여론조사를 보니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73.9%로 나타났습니다. 9월 4일 발표에서는 지난주보다 0.8% 하락했지만 73.1%가 ‘잘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 정도 수치라면 국정운영 체감도에 있어 안 대표가 느끼는 것과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도 사이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실에 대한 체감도 얘기가 나온 김에 몇 가지 더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세기의 재판이라고 불린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국민적 관심과는 달리 왜 법정 중계를 못하게 했을까요 우병우 재판에서 언론으로부터 ‘검찰의 수모’(노컷뉴스 8월 30일 보도 참조)라고 보도될 만큼 검찰은 무슨 이유로 판사로부터 수사지휘를 받아야했을까요 뉴라이트 사관 논란에 휩싸인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에게 ‘생활 보수’가 아닌, 올바른 역사인식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까요 북 핵실험 대응 정국에서 한국당이 부당노동 행위 조사를 거부한 김장겸 MBC 사장 체포영장 발부에 장외 투쟁할 만큼 그 사안이 중요한 현안일까요
국민들이 기대하는 수준과 현실 사이 체감온도가 많이 다릅니다. 지난 촛불혁명에서 국민들이 원한 것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숱한 정치적 상황과 주요 재판, 언론 현장, 청문회 등 각종 사회적 현안에서 요란한 소리에 비해 정작 중요한 두 가지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공적 책임과 ‘공공성’입니다.
장자 내편 ‘응제왕(應帝王)’편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남해의 임금을 숙()이라 하고 북해의 임금을 홀(忽)이라 하며 중앙의 임금을 혼돈(混沌)이라 한다. 숙과 홀이 때마침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이 매우 융숭하게 그들을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혜에 보답할 의논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눈, 코, 귀, 입의 일곱 구멍이 있어서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이 혼돈에게만 없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 주기로 했다. 그래서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7일이 지나자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장자가 얘기한 혼돈에 대한 해석들은 다양합니다. 소통과 관련해 얘기 하는 연구자가 있는가 하면, 작위(作爲)가 없는 본래적 상태(무위자연)로 해석하는 이도 있습니다.
저는 혼돈을 그냥 혼돈으로 보고 싶습니다. 남해와 북해는 단순 비교해도 의미하는 바가 서로 다릅니다. 남해는 밝음과 따뜻함이, 북해는 어둠과 차가움으로 인식되고 분류됩니다.
이 서로 다른 의미와 가치추구가 혼돈 땅에서 서로 잘 어울렸다는 것은 다름 아닌 혼돈이 갖는 ‘모호함’ 때문입니다. 혼돈의 땅에서는 모든 게 마구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밝음과 어둠, 따뜻함과 차가움의 본성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정체성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은 바로 이 땅의 탐욕과 야합이라는 혼돈에서 빚어진 대참사입니다. 눈, 귀, 입, 코가 뚫려 제대로 보고, 듣고, 말하고, 분별하는 분별력이 작동되는 사회였더라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촛불 민심이 원하는 ‘나라다운 나라’는 뭘까요 실상에 대해 눈 감지 말고, 사실대로 듣고, 말하고, 분별함으로써 혼돈이 더 이상 이 나라에서 판치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것 아닌가요.
공적 책임감, 공공성이 살아 있는 나라입니다. 혼돈을 물리칠 각 주체들의 공적 책임감, 공공성이 살아난다면 현재 소란스러운 각종 사회 현안들도 정리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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