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국립공원 1호 지리산

입력 2017.09.04. 09:56 수정 2017.09.04. 19:15 댓글 0개
김종석의 무등칼럼 무등일보 대표이사

지리산은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졌다. 또 신라 5악의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 해서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렸다.

백두산이 반도를 타고 내려와 이곳까지 이어졌다는 뜻에서 두류산(頭流山), 불가에서 깨달음을 얻은 높은 스님의 처소를 일컫는 뜻의 ‘방장’을 따서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불린다. 구례군, 전북 남원시, 경남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 등 3개도 5개 시·군의 사람들에게 품의 자락을 내주고 있는 명산이다.

작가 신정일씨는 ‘새로 쓰는 택리지’에서 지리산을 언급했다.

“지리산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숨어들었던 곳이다. 조선 중기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는 병란과 흉년이 없는 피난, 보신의 땅을 찾는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찾아들었고, 혁명을 꿈꾸다 실패한 동학도들이 찾아와 후일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1차, 2차, 3차 의병항쟁의 주역이 된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남부군이 들어와 수없이 죽어가고 포로가 된 비운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고. 지리산의 품이 질곡의 사람들을 보듬는 현장이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래 지리산에 기대 사는 구례사람들은 한국전쟁 이후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되기까지 자발적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다.

1955년 구례중학교 우종수 교사가 중심이 된 연하반산악회(현 지리산산악회)가 시초다. 이들은 입산허가를 받아 현재의 등산로 대부분을 개척했다.

특히 1960년대 초 정치적인 혼란을 틈타 사리사욕에 눈먼 사람들의 불법 남벌로 지리산 원시림이 파괴되어가는 참상을 목격한다. 분노를 느낀 구례 사람들은 1964년 3월 군민대회를 열고 ‘지리산국립공원 추진 위원회’를 결성,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구례군은 인구 8만 명에 1만 2천 가구가 살았는데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1만 가구의 회원들이 매 호당 10원씩의 회비를 자진 납부, 10만 원의 활동 기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당시까지 국립공원 지정을 담당할 행정기관이 없었다. 주민들은 1965년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을 위한 건의 진정서를 제출했고, 다시 가구당 추가로 활동기금을 모금 한다. 건설부는 공원법에 기초해 1967년 12월 29일 지리산을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

대한민국 제1호 국립공원 지리산 국립공원이 지정 5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구례군은 지난 1일부터 이틀간 기념행사를 가졌다. 기념행사는 지리산 국립공원의 발전과 비전을 논하는 심포지엄 등 다채로운 행사로 운영됐다. 같은 날 구례에 지리산 공원도 개장했다. ‘산은 인간을 보듬고 인간은 보호를 통해 답한다’는 구례사람들의 지리산 사랑 정신을 국립공원 1호 지정 50주년에 되새겨 본다. bellston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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