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시대적 목소리' 담아낸 시민 축제였던 전야제

입력 2020.04.07. 18:31 수정 2020.04.07. 18:51 댓글 0개
<첫 취소, 5·18 전야제는 어떤 행사?>
87년 6월항쟁 기점 광장 추모 재개
이듬해 치러진 오월 행사가 기원
신군부 단죄부터 세월호·촛불혁명까지
'오늘을 밝히는 5월 민주에서 평화로' 39주기 5·18민주화운동 전야제가 지난 2019년 5월 17일 오후 5·18 최후 항쟁지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렸다. 뉴시스

5·18전야제는 5·18민주화운동 기념행사의 '꽃'으로 꼽히며 매년 그 시대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그릇' 역할을 해왔다. 1980년 당시를 경험한 자는 물론 이후 세대까지 아우르는 기획으로, 광주 시민들의 축제로 자리잡아왔다.

정문영 전남대 5·18 연구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전야제가 범시민적 의례로 정착된 것은 1988년부터다.

5·18 이후 광주에서는 다수가 모이는 일 조차 전두환 정부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됐다. 희생자들이 묻힌 망월동 참배도 1987년까지 엄격히 통제됐다. 암암리에 추진된 추모 행사는 경찰의 습격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다 1987년 7월, 6월 항쟁으로 숨진 이한열 열사의 시신이 망월동 묘지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수 십만명의 시민들이 금남로에 모여 노제를 열면서 옛 전남도청 앞 광장은 다시 시민들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인 1988년 5월 17일 광주 구동 실내체육관에서 행해진 5·18 관련 집회가 전야제의 시작이 됐다. 5월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판소리와 진혼굿, 노래극, 연극, 마당굿이 무대에 올랐고 고무된 시민들은 옛 전남도청 앞 광장까지 행진했다. 시민들은 이튿날인 18일까지 이곳을 지켰고, 30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처음으로 5·18기념행사를 열었다. 당국의 허가없이 범시민적 투쟁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이날 이후 옛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는 5월 행사의 장으로 용인됐다.

전야제는 5·18 기념주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도입 의례의 성격을 갖는다. 거리행렬굿 등 다양한 대규모 공연과 볼거리 등은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민선 지방자치가 시작된 1996년 전야제는 처음 경찰의 보호 아래 행사가 치러지는 등 5·18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협조적으로 바뀌었다.

이듬해에는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첫 5·18국가기념식이 개최됐고 이를 계기로 '기념식은 정부 행사', '전야제는 시민 행사'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후 더욱 전문화된 전야제에는 최대 10만 군중이 동참하기도 했다.

강경투쟁 일변도를 벗어나자는 주장이 제기되며 1998년부터는 정태춘, 양희은, 리아 등 대중가수도 초청해 시민들에게 한발 더 다가갔다.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규모와 내용면에서 대중성을 갖추는 등 성장했다.

하지만 보수 정권이 재집권하면서 전야제는 다시 '시대의 목소리'를 담았다. 2014년에는 기념식에서의 제창 조차 허가되지 않았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공식기념곡으로 지정하자는 촉구도 이끌었다.

2017년과 2018년에는 촛불 혁명의 목소리를 담아 적폐청산을 촉구하는가 하면 대형 평화의 소녀상 조형물이 등장하는 등 전야제는 줄곧 당대의 시대적 요구를 담아왔다.

조진태 제 40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시대의 의미를 담아왔던 5·18 전야제가 취소되는 것은 아쉬운 일이나 코로나19 극복이 전 국가적인 과제인 만큼 동참하자는 목소리를 모았다"며 "그러나 이럴 때일 수록 행사를 초월해 5월 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계기이다. 고통받는 대구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나 광주 시민들이 일상에서 5·18 40주년을 추모하는 방법을 모색 중에 있다"고 설명했다. 서충섭기자 zorba85@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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