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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⑨북, 2016년 고려 덕종·정종 능 발굴 발표
입력 2020.02.29. 06:00 댓글 0개부왕(父王)인 현종(顯宗)의 무덤과 근접
북, 숙릉(肅陵)과 주릉(周陵)으로 확증 발표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 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 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9. 덕종(고려 9대 왕)과 정종(고려 10대 왕)의 무덤인 숙릉(肅陵)과 주릉(周陵)
2016년 북한 고고학계는 개성시 해선리 북쪽에 있는 ‘해선리 1릉’과 ‘해선리 2릉’을 발굴하고, 이 무덤이 각각 고려 9대 덕종(德宗)과 10대 정종(靖宗)의 무덤이라고 발표했다. 덕종의 능호는 숙릉(肅陵)이고, 정종의 능호는 주릉(周陵)인데,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북쪽 교외(北郊)에 장사지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 동안 능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조선 세종(世宗) 1432년(세종 14)에 숙릉과 주릉 주변에서 벌목하거나 채취하는 것을 금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까지만 해도 간수인(묘지기)을 두고 관리가 이뤄진 것으로 판단되지만, 그 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능의 위치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엽 영조(英祖) 때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숙릉과 주릉의 위치가 “개성 북교”로 나와 있지만, 이 기록은 조선 초기에 나온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른 것으로 당시 두 능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숙릉과 주릉의 발견은 실로 500여년 만에 이룬 '역사적인 쾌거'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뚜렷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아 앞으로 남북학계의 상호 토론과 논증을 통해 확증작업이 더 진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숙릉’과 ‘주릉’이 개성시 해선리 소재에서 북동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매봉 남쪽 경사면에 250m 간격을 두고 동서로 나란히 조성돼 있다고 발표했다. 위성사진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숙릉과 주릉은 평양-개성 고속도로 서쪽으로 가까운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 태조 현릉(顯陵)에서 북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져 있다. 덕종과 정종의 부왕(父王)인 현종(顯宗)의 선릉(宣陵)에서도 북동쪽으로 1.5km 정도 떨어져 있어 선릉 뒤쪽 언덕을 넘으면 바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2016년 발굴 초기 사진을 보면 봉분이 무너져 내리고, 석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왕릉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특히 숙릉보다 주릉의 상태가 더욱 퇴락한 모습이었다. 북한학계가 그 동안 ‘해선리 1릉’, ‘해선리 2릉’으로 지칭한 이 무덤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도 이처럼 무덤이 너무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향으로 보성된 숙릉의 능 구역은 화강석(화강암) 축대들에 의해 각각 3개의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다. 1단에는 봉분과 일부 난간석이 남아 있고, 병풍석은 매몰돼 있는 상태였다. 2단에는 문관을 형상한 돌조각상(文人像)이 좌우에 2상씩 있었지만 일부는 넘어져 있었다. 3단에서는 정자각(제당)터가 발견됐다.
숙릉 무덤칸(묘실) 천정은 5개의 큰 판석을 덮은 평천정이고, 다듬은 화강석으로 벽체를 쌓은 무덤칸의 크기는 남북길이 3.77m, 동서너비 3m, 높이 1.65~1.73m로 조사됐다. 숙릉의 무덤칸에서는 금동활촉, 금동장식판, 은장식품들, 그리고 각종 청자기조각 등의 유물들이 출토됐다.
정종의 무덤으로 추정된 왕릉은 덕종의 무덤에서 북동쪽으로 250m 정도 떨어진 골짜기에 있다. 발굴 전 주릉은 봉분이 무너져 내리고, 석물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등 숙릉보다 더 훼손된 상태였다. 발굴 초기 사진을 보면 ‘주릉’은 3단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1단에는 봉분과 난간석들이 일부 남아 있고, 병풍석은 대부분 묻혀 있었다. 2단에는 문인석 하나가 넘어져 있었고, 3단에는 정자각터가 남아 있다.
발굴 결과 무덤칸(묘실)은 벽체를 정교하게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쌓았으며, 천정은 2개의 돌로 된 들보를 건너대고 13개의 판석을 덮은 평천정으로 돼 있었다고 한다. 무덤칸의 크기는 남북길이 3.56m, 동서너비 3.38m, 높이 2.2m로 조사됐다.
특히 다른 고려왕릉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건축양식도 나타나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주릉의 무덤칸은 천정을 여러 개의 돌기둥으로 받치는 양식으로 조성됐는데, 이러한 형식은 5세기 후반 고구려 왕릉인 쌍영총과 비슷하다. 쌍영총도 2개의 8각 돌기둥이 천정의 들보를 받치고 있다. 이같은 주릉의 무덤칸 내부구조는 숙릉과 완전히 다른 양식이다.
주릉에서는 발굴과정에서 다양한 고려청자 조각들이 출토됐다. 북한 고고학계에서는 무덤의 외부 건축양식, 무덤칸의 규모와 축조 방식, 출토 유물, 『고려사』 등의 옛 문헌기록에 기초해 새로 발굴한 ‘해선리 1릉’과 ‘2릉’을 덕종과 정종의 무덤으로 확증했다고 한다.
-고려 천리장성을 완성한 덕종과 정종
고려 9대 덕종(德宗)과 10대 정종(靖宗)은 현종과 원성태후 김씨(元成太后 金氏)사이에서 태어난 친형제 사이다.
덕종(1016-1034년, 재위: 1031-1034년)의 이름은 왕흠(王欽)이고, 1020년(현종 11)에 연경군(延慶君)에 봉해지고 1022년(현종 13)에 태자에 책봉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7세였다. 1031년(현종 22) 5월에 현종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중광전(重廣殿)에서 16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덕종은 어려서부터 성숙했으며, 성격이 강인하고 결단력이 있었다고 한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기왓장을 밟기만 하면 깨어졌는데, 사람들은 이를 보고 왕의 덕이 무겁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1032년(덕종 원년)에는 왕가도를 감수국사(監修國史)로, 황주량(黃周亮)을 수국사로 삼아 태조에서부터 목종(穆宗)에 이르는 7대의 사적을 36권으로 구성한 7대실록을 완성했으며, 1034년(덕종 3년)에는 양반 및 군인과 함께 한인(閑人)에게도 토지를 지급하는 것으로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였다. 한인은 고려 시대에 있던, 토호(土豪) 출신의 무인(武人)을 말한다.
그러나 덕종의 개혁정치는 재위 4년만에 사망한 탓에 오래가지 못했다. 병에 걸린 덕종은 동생인 평양군 왕형(王亨) 즉, 정종(靖宗)에게 왕위를 계승케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나이 19세였다.
고려 후기 유학자 이제현(李齊賢)은 덕종에 대해 “부모상을 당해서는 자식으로서 효성을 다하였고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아버지의 하던 일을 고치지 않았으며, 원로들인 서눌(徐訥)과 왕가도 그리고 최충(崔冲)과 황주량 등을 신임하여 서로 기만하는 일이 없었다고 하면서 그러한 결과로 백성들은 제각기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하여, 시호에 덕을 붙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평했다.
고려 10대 국왕인 정종(1018년~1046년, 재위 1034~1046년)은 현종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왕형(王亨)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종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며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였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었으며, 식견과 도량이 크고 강단이 있어서 사소한 절차에 구애받지 않았다고 한다.
정종은 대외관계에서 현안이던 거란(요나라)과 화친을 맺었다. 당시 국제정세가 거란을 중심으로 재편된 이상 고려도 더 이상 거란과 사소한 문제로 갈등을 지속할 필요가 없었다. 거란도 고려가 송이나 여진과 외교관계를 맺고 자국을 견제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더 이상 고려를 압박할 수는 없었다. 양국이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한 것이었다.
국무에 전념하던 정종은 1046년(정종 12) 4월 병에 걸렸다. 모든 관리들이 정종의 회복을 바라며 절에 가서 기도를 올렸다는 사실을 보면, 매우 심각했던 듯하다.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한 정종은 5월에 이복동생 휘(徽, 문종)를 불러 국정을 맡기고 사망했다.
덕종은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1033년(덕종 2)부터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 도련포(都連浦, 함경남도 정평)에 이르는 석성(石城)을 쌓게 했고, 1000여리(400km 가량)에 달하는 이 고려장성(천리장성)은 12년에 걸친 공사끝에 정종 10년(1044년)에 완성된다.
고려는 성종과 현종 때 거란, 여진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극복하면서 내부적으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마련한 뒤 덕종과 정종을 거쳐 문종에 이르는 시기에 토지제도와 신분체제가 완비되어 황금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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