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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병 지렛대로 북핵 협상'···이라크·호르무즈 결단 공통점
입력 2020.01.22. 18:24 댓글 0개"북핵 6자회담 다자외교틀 형성…이라크 파병 결정이 큰 힘"
"외교, 보이지 않는 게 더 많아"…文 신년 회견 내용 주목
파병으로 대미 협상력↑…靑 "결정 배경 추후 알게 될 것"
[서울=뉴시스]김태규 기자 = 정부의 중동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파병 결정은 여러모로 2003년 이라크 파병과 닮은 꼴을 하고 있다. 한미 동맹의 신뢰를 보여주고 이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목적이 파병의 공통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제기 된다.
국방부는 지난 21일 현 중동 정세를 감안해 우리 국민의 안전과 선박 보장을 위해 청해부대의 '파견 지역'을 한시적으로 확대한다며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사실상 파병 방침을 밝혔다.
청해부대의 파견 지역 확대는 미국 주도의 국제해양안보구상(IMSC)에 참여하지 않는 한국군의 독자적인 작전 수행 형태를 말한다. 기존 소말리아 아덴만 일대에서 임무를 수행중인 청해부대의 작전 반경을 오만만과 페르시안만 일대까지 확대해 호르무즈 해협 일대를 지나는 우리 선박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지속적인 파병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이란과의 경제·문화 교류 등을 종합적인 상황을 감안했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일종의 절충안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며 "전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문 대통령은 기업과 교민 안전, 원유 수급, 한미동맹, 대(對) 이란 관계를 복잡한 문제의 예로 들었다.
호르무즈 파병에 대한 정부의 구상은 이달 초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미국 방문 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됐을 가능성이 높다. 정 실장은 귀국 후 "중동 문제와 관련한 트럼프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의 말을 드렸다"고만 언급했다.
앞서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16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IMSC 일원으로 참여하는 형태의 파병 전망에 선을 그으면서도 내부적으로 검토가 상당히 진척됐다며 발표가 임박했음을 시사한 바 있다.
정부가 호르무즈 파병을 진지하게 검토한 시점은 지난해 8월 이후부터로 추정된다. 정 실장은 지난해 8월6일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미국으로부터 우리 군에 대한 호르무즈 해협 파병의 구두 요청이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사흘 뒤 한국을 찾은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은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호르무즈 해협에서 항행의 자유 필요성을 강조하며 국제사회의 협조를 당부했다. 에스퍼 장관의 문 대통령 예방(8월9일) 때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가 전달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시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여부로 한일 갈등이 최고조로 달했던 시점으로 미국의 호르무즈 파병 압력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받았던 측면이 있다.
한미 간 본격적인 파병 결정 논의는 이달 초 미국의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고드스군 사령관 표적 살해 이후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정의용 안보실장,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미국을,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이란을 일주일 간격으로 각각 방문한 바 있다.
정부가 호르무즈 파병 방침에 대해 이란 당국과 사전에 논의를 거쳤다고 설명한 것도 정 장관의 이란 방문(1월14일)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 관측 된다.
세부 국제 정세의 차이는 있지만 이번 호르무즈 파병은 2003년 초 참여정부에서 이뤄진 이라크 파병 결단과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미동맹과 연계한 미국의 지속적인 파병 압박을 정부가 고심 끝에 수용했다는 점이 닮아 있다.
이라크 파병 당시 미국이 요구한 전투병 파병 대신 전후 재건 목적의 비전투병을 파병한 것과 미국 중심의 호르무즈 호위 연합체 대신 청해부대 독자 파견을 결정한 부분도 미국 요구를 100% 수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특히 미국의 협조를 통해 북핵 문제를 풀어보겠다는 17년 전 노무현 대통령의 현실적인 고민은 미국의 용인 없이 남북 협력사업을 추진할 수 없는 문재인 대통령의 현재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조건으로 우리의 요구를 주장할 수 있는 일종의 '협상의 공간'이 생겼다는 점은 유사하는 평가다.
노무현 대통령의 2003년 이라크 파병 결정 과정은 문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에 비교적 자세히 서술돼 있다. 당시 거셌던 미국의 압박, 외교안보라인과 정무라인으로 갈린 찬반 입장, 파병을 결정할 수 밖에 없던 노 대통령의 고민이 담겨 있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임기 첫해, 대통령이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결정이 이라크 파병이었다"며 "북핵 문제를 외교적 방법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대통령 소신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선 미국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고, 그러자면 미국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줄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고 토로했다.
미국의 이라크 파병 요청은 2003년 초부터 거세졌고 결국 2003년 4월2일 이라크 파병 동의안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4개월 뒤인 2003년 8월 북핵 6자회담이 처음 가동됐는데, 한국 정부의 파병 결정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미국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어려웠다는 게 문 대통령의 자서전 속 설명이다.
문 대통령은 "어렵고 고통스런 결정이었지만 파병을 계기로 북핵문제는 (노) 대통령이 바라던 대로 갔다. 미국의 협조를 얻어 6자회담이라는 다자외교 틀을 만들어 냈다"며 "한때 북폭까지 주장했던 네오콘의 강경론을 누그러뜨리면서 위기관리를 해 나갈 수도 있었던 바탕엔 우리가 이라크에 파병했다는 것이 큰 힘이 됐다"고 술회했다.
2004년 6자회담 한국측 수석대표를 맡았던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은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에서 "한국의 이라크 파병으로 한미 두 정상의 관계가 부드러워졌다"며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북핵 문제에 대한 노 대통령의 의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일 사정이 됐다"고 회고했다.
미국의 파병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북핵 문제 해결에 있어 한국 정부에 협상력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점을 문 대통령과 송 전 외교부 장관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들어 남북협력 사업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문 대통령이 이 점을 충분히 활용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결의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용인 없이는 어느 하나라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면제 조항을 활용해 결의안을 피해가는 방안도 녹록지 않지만 미국이 용인 아래서는 불가능한 방안도 아니다.
문 대통령이 올해 초부터 대북 5대 협력사업(남북 철도도로 연결·남북 접경지역 협력·2032년 올림픽 남북 공동개최·비무장지대(DMZ)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동 등재·김정은 국무위원장 답방)을 공론화하기 시작한 것도 미국과의 물밑 접촉을 통해 나왔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외교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부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더 많이 있다"면서 "남북 간 대화를 통해 협력을 늘려나가려는 노력들은 지속되고 있고 충분히 잘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갖고 있다"고 밝힌 것도 이러한 맥락 위에서 해석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구체적인 호르무즈 파병 결정 과정에 대해서 지금 시점에서 선제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면서 "어떤 흐름과 배경을 거쳐 힘든 결정을 내리게 됐는지는 추후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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