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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만에 이뤄진 여순사건 재심재판 후 과제는?

입력 2020.01.20. 18:44 댓글 0개
첫 재판은 걸음마 단계…희생자 명예회복·진실규명 조사 시급
【여수=뉴시스】김석훈 기자 = '여순사건 70주기 합동추념식'이 19일 오전 전남 여수시 중앙동 이순신광장에서 거행된 가운데 희생자 유족들이 분향하고 있다. 여순사건 70주년 기념 추모사업 시민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진행된 합동추념식은 여순사건 희생자 유족과 김영록 전남도지사, 권오봉 여수시장, 주승용 국회부의장, 이용주 국회의원, 4대종단, 시민사회·안보보훈단체 회원,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여했다. 2018.10.19. (사진=여수시청 제공) kim@newsis.com

[순천=뉴시스]김석훈 기자 = 70여 년 전 전남 동부지역 민간인이 죽어간 여순사건(10·19사건) 당시 내란죄로 처형당한 철도기관사에 대한 첫 무죄가 선고가 20일 내려지면서 선고 의미와 과제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1948년 전남 여수에서 발발해 순천과 인근 지역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어간 여순사건의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는 역사적 재판이 20일 전 국민의 관심 속에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열렸다.

광주지법 순천지원 제1형사부(부장판사 김정아)는 내란 및 국가 문란 혐의로 기소된 고 장환 봉(당시 29세) 씨에 대한 재심에서 7차 재판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이날 선고로 모든 희생자의 진실이 규명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이제 막 걸음마 단계일 뿐 희생자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가 더욱 더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유일하게 순천철도기관사였던 아버지 장환봉씨의 딸 장경자(75) 씨 등 3명이 재심을 청구한 것도 10년만인 지난해 3월 대법원에서 재판개시 결정이 날 정도였다. 그나마 장 씨 외 다른 2명은 이미 고인이 돼 재심 자체도 이뤄지지 않았다.

주철희 박사(역사학자)는 "국가권력이 민간인에 대한 불법·위법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재판과정서 드러났다"며 "이에 따라 앞으로 국가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는 물음이 나오고, 당연히 이들을 구제할 수 있는 특별법을 제정해야 하는 논리가 당위성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 박사는 "사법부가 법적으로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입증했기에 입법부와 행정부가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주 박사는 "다만 순천지원서 이뤄진 재심 재판은 1948년 군사재판을 통해 희생자들이 대상이며 재판없이 즉결심판을 받고 숨진 이들은 재심 재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재심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되고 있다 "면서 "앞으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돼 모두 다 법 적용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고인의 딸 장경자 씨도 "내란죄 무죄 선고로 기쁘지만 많은 유족이 돌아가신 마당에 모두가 재심 재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특별법이 제정돼 국가의 과거 잘못이 낱낱이 국민에게 알려지고 국가 사과 및 명예회복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순천지원 김정아 판사는 이날 선고 공판에서 판결문 낭독 후 국가의 과거 잘못이 바로잡아지길 바란다면서 기립해 고개 숙였다.

김 판사는 "재판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무고한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명예회복을 위한 길이 아직 멀고 험난하다. 더 이상고단한 절차를 밟지 않고 하루빨리 특별법 제정 통해 구제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김 판사는 선고하면서도 "장한봉님은 좌익도 아니고 우익도 아니며, 오로지 국가가 혼란스럽던 시기에도 몸과 마음을 바쳐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고자 했던 명예로운 철도 공무원이었다"며 "사법부 구성원으로서 고 장한봉과 유족께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히며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순천=뉴시스]김석훈 기자 =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20일 열린 여순사건 재심 재판에서 순천역 철도기관사 고 장환봉 씨에 대해 무죄가 선고된 후 고 장환봉 씨의 아내 진점순(97·여)씨와 딸 장경자(75·여)씨가 소감을 말하고 있다. 2020.01.20. kim@newsis.com

김 판사는 국가를 대신해 70년 지난 후 고인에 대한 유죄 판결이 잘못됐다고 선언한 것이며 더 이른 명예회복의 길을 찾지 못한 점 등을 아쉬워했다.

재판을 지켜본 방청객은 김 판사의 사고에 일제히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으며, 여순사건 첫 재심과 무죄 선고한 피고인 1명에 그치지 않고 향후 더 많은 재심 재판이 이뤄지길 기대했다.

또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통해 개개인의 재판이 아닌 모두의 재판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국가를 향한 적극적인 서명운동 등을 펼치기로 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읍 신월리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일부 군인이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제주 출병을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14연대 일부 군인들은 여수경찰서를 거쳐 순천까지 진격했으며, 급파된 정부군은 순천을 점령한 뒤 토벌에 나섰다. 이 과정서 밤낮 할 것 없이 좌익과 우익으로 양분돼 무고한 민간인이 부역했다는 이유로 당했지만, 70여 년이 지나도록 희생자에 대한 추모나 사건의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역사적인 재심 재판 무죄 선고 이후 남은 과제는 모두를 아우르는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으로 향하고 있다. 또 군사 재판으로 피해를 본 희생자를 찾아내 국가를 상대로 재심 재판을 청구할 필요성도 있다.

현재까지 여순사건과 관련해 공식적으로 희생자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여순사건 1년 후인 1949년 10월 25일 전남도 당국에서 사망자를 조사할 때 1만1131명이었다.

여순사건 당시 군사재판만 3500명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으며 특별법 제정 후 전수 조사 땐 1만 5000명이 예측되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여순사건을 직권조사해 군경이 순천지역 민간인 438명을 반군에 협조·가담했다는 혐의로 무리하게 연행해 살해했다고 인정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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