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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경박성의 권력화
입력 2020.01.17. 16:25 수정 2020.01.19. 14:26 댓글 0개세상이 갈수록 경박해지고 있다. 경박해지는게 아니라 아예 경박해야 주목받고 인정받는 풍토가 조성됐다. 경박한 언사, 처신, 주장에다가 사람들의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진지함이나 사려깊음은 도무지 찾아보기 힘들다. 그 중 막말, 욕설, 폭언, 조롱, 고성, 비아냥이 난무하는 국회의 모습은 이 시대 경박성의 압축장이다. 주장을 달리하는 정당들끼리 비판하고 공격하는 일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보여주고 있는 의원들의 모습은 경박하기 짝이 없다. 듣기 민망한 언어들로 채워진 각 당의 대변인 성명서를 보면 전달하고자 하는 주장의 내용은 사라지고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가득찬 폭력적 단어들만 나열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국민의 대표 자격으로 국사를 논의하는 자리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경박하기 짝이없는 모습이 하루가 멀다하고 TV화면을 통해 전국민들에게 생방송되고 반복되는 세상이다.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 주세요'. 대세 미디어로 급성장 중인 수많은 유튜브의 진행자들이 수시로 강조하는 말이다. 특별히 오락성 콘텐츠를 생산하는 유튜버에만 해당되는게 아니라 모든 유튜버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게 바로 '구독'과 '좋아요'이다. 시사교양 또는 문화예술 등 주제와 분야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유튜버들에게는 구독자수와 조회수가 필요하다. 보다 많은 구독자와 조회수를 확보해야 생존이 가능하고 수입이 늘기 때문이다. 비교적 긴 호흡의 영상물을 제공하는 공중파방송이나 케이블방송에 비해 유튜브 영상은 짧고 간결하다. 그런만큼 순간순간 이용자들의 호응을 얻어야 하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경박성의 권력화가 발생한다. 경박할수록 보다 많은 구독자와 조회수를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주제, 표현, 대사, 몸짓, 의상, 출연자들의 인기가 상승한다. 진지하고 차분한 대화와 토론은 호응을 얻기 어렵다. 물론 주제와 분야가 매우 진지하고 시대적 성찰에 기반한 품격있는 유튜브들도 있지만 경박성의 권력화를 막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경박성은 일반적으로 품격, 교양, 예의, 배려, 양보, 성찰, 경청 등과 같은 민주시민성을 구성하는 요소들과는 거리가 멀다. 생활의 활력소이자 지루한 일상의 탈출이라는 오락과 휴식으로서의 가벼운 즐거움을 지향하는 재미와 흥미로서의 가치관과는 차원이 다른 경박성을 걱정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지도자들의 경박한 언사와 태도, 각종 미디어의 천박한 콘텐츠는 전 국민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아도 현대인들이 고단한 일상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힘든데 경박하기 이를데 없는 정치인들이나 미디어 출연자들의 무례하고 불편한 독설과 막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고통이다. '생각이 깊지않고 조심성이 없어 말과 행동을 가볍게 하는 특성이나 성질'이라는 경박성에 대한 사전적 설명은 차라리 매우 점잖은 편이다. 실제 우리사회의 경박성 지수는 사람들의 일반적 상식을 훨씬 뛰는 수준으로 사회심리적 병리현상으로 다루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과도하게 과묵하고 점잖은 처신을 신중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강요하던 때를 새삼 미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의 의견을 말하고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근거로 신중한 처신이라는 논리가 채용된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에 상대적으로 자기 표현이 활발하고 행동이 적극적인 아이들에게 '주의가 산만하다',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등의 지적으로 교사의 가르침에 무조건 순종적인 모습을 지향하던 때가 있었다. 주인공의 과묵하고 말이없는 모습을 미화한 영화도 많았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미덕인 세상이 되었다. 문제는 선을 넘어서서는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솔직하고 적극적인 자기 표현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은 곤란하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는 명분으로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언사를 일삼는 경박함 까지를 허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경박함이 권력이 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러서야 되겠는가.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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