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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모던보이 1세대 '김우진'을 아시나요

입력 2020.01.13. 11:06 댓글 0개

목포하면 생각나는 인물들이 많습니다. 

그 중 오늘은 근현대사 인물 중 한 분인 김우진 작가의 삶을 볼 수 있는 ‘김우진 거리’로 떠나 볼게요. 

영화 「사의 찬미」에서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분이기도 합니다.

목포시는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김우진을 기념하기 위한 공간을 원도심인 목원동과 갓바위문화타운에 각각 마련했습니다.

목원동은 김우진작가가 살았던 현 북교동 성당 일원입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시대를 적절히 희곡 속에 투영해 당시 계몽적 민족주의와 인도주의, 감상주의에 머물렀던 기성 문단을 뛰어 넘은 선국적 극작가로 활동했습니다.

특히 표현주의를 작품으로 실험한 점이 높게 평가받고 있구요.

김우진 작가는 장성군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을 하셨는데요. 

시인을 꿈꾸며 시를 쓰기 시작했고, 대학 시절에는 연극을 꿈꾸며 연극 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조직하기도 하셨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난파>, <산돼지>는 우리나라 문예사상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으로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신파극만 존재했던 1920년대의 파격적인 실험극이였습니다.

<산돼지>는 친구 조명희의 시인 <봄 잔디밭 위에>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좌절 당한 젊은이의 고민과 번뇌, 그리고 방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난파>는 복잡하게 얽힌 유교적 가조 구조 속에 현대적인 서구 윤리를 지닌 젊은 시인이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그의 자서전이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은 사회개혁 사상을 보여주며 개화 지식인의 임상보고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을 정도로 자신의 삶과 맞닿아 있습니다. 

1921년에는 동우회순회연극단을 조직하여 국내 순회공연을 했는데, 이때 연출을 담당하셨다고 해요. 

대학 졸업 후, 가업을 잇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성합명회사 사장에 취임하셨구요. 

보수적인 유교 가정에서 자라나 부모님의 뜻을 따르긴 했지만 서구 근대사상을 배우며 급진적 사상을 가지게 된 선생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많은 번뇌를 하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에도 시, 희곡, 평론 등 다양한 작품을 쓰셨다고 해요.

그러나 가정, 사회, 애정 문제로 번민하다 1926년 동경으로 출분하시여, 그해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투신하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가족의 삶도 조성되어 있는데요.

봉건과 근대가 뒤얽힌 모순의 삶, 세 형제의 아버지 김성규는 무안감리서 6대 감리였습니다. 

목포 조선인들의 인권 보호에 앞장서며 퇴임 후 기업인으로 변모해 삼성합명회사를 설립하셨구요.

그의 첫째 아들 김우진 작가, 둘째 아들 김철진은 신간회 목포 간사로 우파 지식인으로 변모해  도의원을 지내고 호남평론 발행인으로 활동했습니다. 

셋째 아들 김익진은 맏형의 죽음으로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했으며 중국 혁명군에 참여하다가 천주교에 귀의하여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 당대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로 최초 신극 운동을 일으킨 연극 운동가인 김우진 작가의 발자취를 보고 싶으시다면 목포역 인근에 있는 김우진 거리를 방문해보세요!

※ 본 게시글은 전라남도 SNS 관광 기자단 권현아 기자님이 작성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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