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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입력 2017.08.22. 13:41 수정 2017.08.23. 14:42 댓글 1개여자는 댄스파티에서 처음 본 남자와 춤을 췄다. 스물일곱 살의 이혼녀인 그녀는 치근거리지 않고 다정하고 예의바른 남자와 단 하룻밤 만에 사랑에 빠졌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떠났다. 남자가 떠나자마자 경찰이 들이닥쳤다. 곧바로 가택수색이 이루어지고 그녀는 경찰서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녀의 아파트에 하룻밤 묵었던 남자가 사실은 은행 강도 용의자였으며, 그녀는 그의 도주를 도운 범죄 가담자라는 게 이유였다.
심문은 오래 걸렸다. 조서에 기록된 문장을 그녀가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평소 모범적인 가사도우미로 정평이 나 있었던 그녀는 수사과장이 취조 과정에서 사용하는 문장을 견딜 수 없어 한다.
조서에 적힌 신사들(그녀가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는)의 다정함은 치근거림으로, 지인들의 친절함은 선량함으로 단어를 바꿔야 한다고 그녀는 개념정의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다정함은 양쪽에서 원하는 것이고, 치근거림은 일방적인 행위인데 항상 자신에겐 후자의 경우였기 때문에 치근거림 대신에 다정함이라고 쓰여 있는 조서에는 절대 서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조서를 쓰고 귀가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신문의 문장들이었다. 심문 내용은 비밀에 부쳐지지 않고 바로 언론으로 넘겨졌다. 신문은 그녀를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이며 ‘전적으로 범죄를 일으킬 수 있는’ 여자라는 문장으로 단정을 내리는 것도 모자라 그녀의 아파트를 강도들의 아지트 혹은 무기 거래 장소로 둔갑시켜버린다. 하룻밤 만난 남자를 약혼자로 날조하고, 그녀에게 선량하게 대했던 지인들을 빨갱이들이자 좌파로 왜곡한다.
설상가상으로, 기자의 취재원이 된 그녀의 주변인들은 얼토당토 않는 말들을 쏟아낸다. 한 신사는 40년 교육 경험이 있는 자신은 사람을 잘못 보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그녀의 과격한 행적은 계획적이라고 확신한다며 그녀를 비방한다. 그녀의 고향 교회 신부님은 자신의 후각은 항상 믿을 만한데, 그녀가 공산주의자라는 냄새를 그냥 맡았노라고 신문 기자에게 주절거린다. 그녀 삶의 모든 부분이 시시콜콜 파헤쳐지고 세세한 구석까지 남김없이 까발려진다. 하나같이 왜곡되고 오도되고 모욕적인 진술은 여론의 관심을 끈다는 이유만으로 언론에 보도된다. 흥미위주의 자극적인 내용과 역겨운 문장으로 점철된 신문 기사를 꼼꼼하게 읽어가던 그녀는 자신의 명예가 치명적으로 상실되고 삶이 파괴되었음을 고통스럽게 인식한다. 그녀는 묵비권을 행사한다.
범죄에 연루된 여자, 은행 강도의 정부, 탈주를 획책하고 범인을 은닉한 공모자, 살인범을 아파트로 유혹해서 하룻밤 사랑을 나눈 다정한 여자, 평소에 새치름하고 뻣뻣하다고 알려졌지만 정작 신사들이 주는 비싼 반지를 몰래 받던 음흉한 이혼녀, 전 남편이 치근댄다고 이혼해버린 몹쓸 타락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극도의 변태…….
그녀는 야만적이고 치졸한 언어에 기획, 포획, 배치, 배포된다. 가방끈이 짧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한 번의 이혼을 했고, 흐트러짐 없는 일상을 견지했고, 남의 집 가사도우미로 근면하게 살았던, 누구보다 언어에 예민했던 스물일곱 살의 여자는 자신에게 덮씌워진 저열하고 더러운 언어에 견딜 수 없어 한다. 무엇보다 그녀에 대해 맹렬하고 지속적으로 자극적이고 비열하고 추잡한 왜곡 기사를 써대는 기자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왜? 대체 어째서?
급기야 그 기자는 그녀의 아파트까지 따라 와서 치근거린다.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보던 기자는 일단 섹스나 한 탕 하자고 말한다. 그녀는 권총을 빼들고 탕, 탕, 탕, 기자를 쏴준다. 그녀가 한 남자와 춤을 추고, 명예를 잃어버리고, 기자를 죽이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닷새!
그녀의 이름은 카타리나 블룸. 독일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쓴 라는 소설의 주인공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설파했던 철학자는 하이데거였다. 이 소설은 언어가 존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여자에 대해 서술할 때는 더더욱!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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