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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이젠 발포명령자다③]'40년 恨' 유족들의 사연

입력 2020.01.05. 18:29 댓글 0개
만삭 임신부·고교생 시민군 등
발포희생자 유족 사연 눈길
'아들 관 앞 어머니의 오열' 사진
조롱·폄훼로 또 다시 고통
'꼬마상주', '5·18둥이' 비극 상징
"진실 꼭 밝혀달라" 호소
【광주=뉴시스】박진희 기자 =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을 마치고 5·18희생자 고 안종필 묘역을 찾아 참배하며 이정님씨를 위로하고 있다. 고 안종필(1964년5월28일~80년 5월 27일)씨는 5월 19일부터 광주항쟁 참여했고 27일까지 도청 지키다가 계엄군에 총탄 맞아 사망했다. 2019.05.18. pak7130@newsis.com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위원회가 5·18 40주기를 맞아 본격 활동에 나선다. 발포명령 등 드러나지 않은 핵심 의혹들이 밝혀질 지 지대한 관심이 쏠린다. 국방부의 헬기사격 인정과 전두환 재판에 이어 지난해 말 옛 광주교도소에서 신원 미상 유해까지 발견되면서 그 어느 해보다 진실 규명의 목소리가 거세다.

이번이야 말로 5·18 집단발포의 실체적 진실을 밝힐 마지막 기회라는 목소리가 높다. 조사위는 역사 왜곡에 대한 마침표를 찍고, 발포명령자를 찾아 책임을 묻는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어야 한다. 1980년 5월 계엄군의 '발포'에 초점을 맞춰 '5월 진실찾기'를 8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광주=뉴시스] 변재훈 기자 =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았지만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희생자는 있지만, 발포 명령자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40 성상이 지났지만 희생자 유족들의 아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가슴이 미어지고 애가 끓는다. 유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 뿐만 아니라, 5·18을 둘러싼 갖가지 왜곡과 폄훼로 또 다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6일 5·18민주유공자유족회 등에 따르면 5·18 당시 열흘(1980년 5월18일~5월27일)간 직접 사망자는 165명, 상이 후 사망자는 112명이다. 이 가운데 총상으로 숨진 희생자는 확인된 것만 128명에 달한다.

만삭의 임신부 딸과 뱃 속의 손자를 잃어야 했던 어머니부터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의 영정을 품에 안았던 꼬마, 5·18둥이에 이르기까지 애끓는 사연은 다양하다.

1980년 당시 임신 8개월의 주부였던 고(故) 최미애(당시 23세)씨는 5월21일 오후 1시50분께 광주 북구 전남대 인근에서 계엄군 3공수여단의 총격에 머리를 맞아 숨졌다. '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살펴보고 정오까지 돌아오겠다' 고등학교 교사인 남편을 찾기 위해 나섰다가 벌어진 참극이었다.

어머니 김현녀 여사가 남편 등과 함께 현장을 찾아갔으나, 딸 최씨는 이미 숨져있던 상태였다. 참혹한 딸의 시신을 가까스로 집으로 옮겼으나, 뱃속에 있는 태아도 20분 가량 심장이 거칠게 뛰다가 잠잠해지며 숨을 거뒀다.

목격담에 따르면 최씨는 전남대 정문 쪽에서 발포로 쓰러진 한 학생의 두 발을 끌고 옮기는 과정에서 총에 맞았다. 총격이 날아온 방면에는 앉은 채 총을 겨누고 있는 계엄군이 있었다. 명백한 조준사격이었다.

팔순을 넘긴 어머니는 만삭의 임신부에 조준사격을 한 이유도, 딸과 손자를 동시에 잃게 한 계엄군 '발포'는 누구 지시한 것인지 여전히 모른 채 한 많은 지난 세월을 살고 있다.

'교복 입은 시민군'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고 안종필(당시 16세)군의 어머니 이정님 여사도 '아들을 더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못했다'는 회한 속에서 괴로운 여생을 보내고 있다.당시 광주상업고등학교(현재 광주동성고) 1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안군은 휴교령이 내려진 5월19일 다음날인 20일 오전 전화 한 통을 받은 뒤 집을 나섰다.

안군이 시위에 나서지 못하도록 숱하게 붙잡고 만류했지만 안군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신발을 쓰레기통에 넣고 교복을 물에 담궈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안군은 교련복을 챙겨입고 도청을 사수하는 시민군에 재합류해 마지막 진압이 있었던 27일 오전 2시께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광주=뉴시스]변재훈 기자 = 1980년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김완봉(당시 15세) 군의 어머니가 아들의 관 앞에서 오열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DB) 2020.01.05.photo@newsis.com

당시 무등중 3학년생이던 고 김완봉(당시 15세)군도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시작된 1980년 5월21일 금남로를 걷던 중 총탄에 맞아 숨졌다.

뒤늦게 적십자병원에서 아들 시신을 찾은 김군의 어머니는 8일 만인 29일 망월동 구묘역에 안장했다. 안장식 당일 아들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한 맺힌 오열이 나경택씨(당시 전남매일 사진부 차장)의 렌즈에 잡혔다.

이 사진은 5·18의 아픔을 상징하는 사진 가운데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33년이 지난 2013년 인터넷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 이 사진이 '아이고 우리 아들 택배왔다. 착불이요'라는 조롱성 글과 함께 게시됐다.

유족들의 아픔을 또 다시 후벼파는 이 같은 행태는 국민적 공분을 샀지만, 5·18을 둘러싼 망언·폄훼는 끊이지 않고 있다.

[광주=뉴시스]변재훈 기자 = 1980년 5·18민주화운동 과정 중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 총에 맞아 숨진 조사천 씨(당시 34세)의 영정사진을 아들 조천호 씨(당시 5세)가 들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DB) 2020.01.05.photo@newsis.com

'꼬마상주'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고 조사천(당시 34세)씨와 조천호(당시 5세)씨 부자의 사연도 오월 광주의 아픔을 상징한다.조사천씨는 5월21일 시민들이 몰고 다니던 트럭에 올라탄 뒤 시위에 나섰으나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쏜 총을 맞았다. 급히 기독교병원으로 옮겼으나 손쓸 겨를 없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조사천씨가 3대 독자였던 탓에, 상주를 맡은 것은 다섯살배기 조천호씨. 그가 하얀 상복을 입고 아버지의 영정 위에 턱을 괸 사진이 독일 외신에 보도됐다. 이후 이 사진은 신군부의 감시를 피해 국내로 몰래 반입된 뒤 대학 운동권 사이에서 돌며 '5·18'의 진실과 아픔을 알렸다.

【광주=뉴시스】전진환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유족의 편지를 낭독한 김소형씨을 안아주며 위로하고 있다. 2017.05.18. amin2@newsis.com

문재인 대통령의 포옹으로 관심을 모았던 '5·18둥이' 김소형(39)씨의 아버지 김재평씨도 계엄군 발포 희생자다. 소형씨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생일'을 간직하고 있다. 1980년 5월18일, 당시 29살이었던 아버지 김재평씨는 소형씨가 태어난 날 계엄군의 총탄에 숨졌다.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낸 딸은 5·18 37주년 기념식에서 '슬픈 생일'이라는 제목의 추모사를 낭독했다. "아버지, 당신이 제게 사랑이었음을. 당신을 비롯한 37년 전의 모든 아버지들이, 우리가 행복하게 걸어갈 내일의 밝은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그녀의 추모사에 대통령도 울었고, 국민도 울었다.

희생자 유족들의 하나된 염원은 누가, 왜 가족의 목숨을 앗아가도록 발포를 명령했는지 하루 빨리 규명하는 것이다.

정수만 전 5·18민주유공자유족회 회장은 "40년 되도록 가족이 왜 세상을 등져야했는지 이유 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 더 큰 한(恨)이다. 조속하고 명확한 진상규명 만이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고통을 덜어주는 길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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