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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재계 거물 펠릭스 로하틴(91) 별세.. 뉴욕시 재건의 공로자

입력 2019.12.15. 09:55 댓글 0개
"월가의 살아있는 전설"
투자은행 '라자드' ( Lazard )회장
[ 뉴욕 = AP/뉴시스] 1976년 뉴욕시 도시지원협의회(MAC )가 열린 회의장에서 연설하는 펠릭스 로하틴 회장.

[뉴욕=AP/뉴시스] 차미례 기자 = 미 재계 거물이자 금융인, 정부 자문역 등으로 뉴욕시의 재정을 감독하는 기구의 의장을 맡아 도시 재정을 이끌었던 펠릭스 로하틴이 14일(현지시간) 서거했다. 향년 91세.

로하틴의 아들 니콜라스 로하틴은 부친이 맨해튼의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원인은 단순히 "노환"이라고 했다.

192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로하틴은 1935년 가족들과 함께 망명, 나치 독일을 피해서 프랑스, 모로코, 포르투갈, 브라질을 거쳐 1942년 미국으로 왔다.

1949년 미들버리 대학교에서 물리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해 투자은행 라자드 프레레스(Lazard Frères)에 입사, 제너럴일렉트릭의 RCA 인수(1986), RJR 나비스코 인수(1988), 소니의 컬럼비아 영화사 인수(1989) 등을 주도했다.

1968년부터 1972년까지 뉴욕증권거래소 위기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75년에는 주 정부가 임명한 뉴욕시 도시지원협의회 의장을 맡아서 1970년대 뉴욕 시의 재정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며 유명해졌다. 한 때 "뉴욕의 구세주"로까지 불렸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주프랑스 미국대사를,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리먼 브라더스 국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2010년 1월 라자드 회장으로 복귀했다 .

바닥이 난 뉴욕시 재정을 위해 그 동안 무료였던 뉴욕 시립대의 수업료를 신설하는 등 과감한 개혁으로 흑자의 기반을 닦은 그는 시민들에게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아니었으면 뉴욕시가 파산을 해서 더 큰 부담이 시민들에게 돌아왔을 것"라는 사람들도 많다.

로하틴은 자신의 일을 외과의사의 직업에 비유하기를 즐겼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고장이 나면 나를 부른다"고 1978년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부러진 곳을 잇고, 상처를 고치고, 바닥에 되도록 가장 적은 출혈 흔적을 남긴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민주당의 기부자였던 그는 1996년 빌 클린턴 정부에서 연방준비이사회 부의장으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공화당이 지배하는 상원의 임명 반대로 불발에 그쳤다.

그 대신 클린턴 대통령은 로하틴을 프랑스 대사로 임명해 그는 1997~2000년까지 대사직을 맡았다.

2010년 라자드 회사에 복귀한 그는 80대에도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다가 2012년 앤드류 쿠오모 뉴욕지사가 2012년 수퍼스톰 샌디로 파괴된 뉴욕의 인프라 재건을 위한 위원회의 공동의장으로 임명하면서 뉴욕을 위해 일해왔다.

로하틴은 '뉴욕 리뷰 오브 북스"의 단골 서평가이자 저술가이기도 했다. 저서들 가운데에는 " 대담한 노력 : 우리 정부는 어떻게 미국을 건설했으며, 왜 지금 재건설이 필요한가" (2009년) "협상: 월가의 전쟁 " ( 2010년)도 포함되어 있다.

로하틴은 1956년 지네트 스트라이트와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1979년에 엘리자벳 플라이와 재혼했지만 그 부인은 2016년 타계했다.

그의 유족으로는 아들 피에르, 니콜라스, 마이클, 의붓 딸 니나 그리스콤과 6명의 손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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