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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질문서 출발한 연극"

입력 2019.11.06. 11:48 댓글 0개
'휴먼 푸가' 공개...6~17일 남산예술센터 공연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2014·창비)가 원작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 '휴먼 푸가' (사진 = 이승희 제공)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마주했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한 작품이에요."

배요섭 연출의 말마따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작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2014·창비)가 원작인 '휴먼 푸가'(Human Fuga)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연극이다.

6~17일 공연을 앞두고 5일 남산예술센터에서 미리 공개된 '휴먼 푸가'에는 여러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는 오브제가 넘친다. 유리병, 카세트테이프, 의자, 밀가루 등 사물뿐 아니라 퍼포머의 신체, 행위, 그리고 음악마저 오브제처럼 보인다.

극은 서사의 전개가 아닌 이 오브제 이미지의 고리를 따라 변주되며 반복된다. 각 장면이 독립 또는 동시다발적으로, 씨줄과 날줄처럼 직조된다.

이를 통해 거대한 죽음과 사회적 고통의 감각들을 목도하는 것이 아닌,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 배 연출의 의도다. 등장 인물들도 배우라고 지칭하는 대신 퍼포머로 정의한다. 이들의 말과 기억, 행동들은 오브제처럼 극의 재료로 변주돼 해체·조립되기 때문이다.

배 연출은 "의미를 두고 오브제를 찾은 것이 아니에요. 한강의 소설을 만나기 이전에 5·18이라는 역사적 사료, 증언을 리서치하는 과정에서 떠오른 영감을 오브제를 통해 여러 방식으로 재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용된 오브제는 직관적인 것들이라고 부연했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오브제의 물성을 반영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유리병은 퍼포머가 영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한 이미지로 가져왔다. 투명함을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 유리병에서 나는 소리와 그것을 옮기는 행위에서 여러 층위의 의미를 발견했다고 한다.

다양한 층위로 나눠지는 것은 원작 소설의 핵심이기도 하다. 1980년 5월 계엄군에 맞서 싸운 이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 받는 내면이 여러 개로 갈라진다.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생겨난 고통이 여러 사람들의 삶을 통해 변주되고 반복되고 있는 것이 소설의 구조인 셈이다. 이는 음악적 형식인 푸가(fuga)와 닮아 있다.

푸가는 하나의 주제가 성부 또는 악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모방 반복되면서 특정한 법칙이 만들어지는 악곡이다. 반복과 변화가 마지막에 가서 하나의 커다란 형식으로 마무리된다.

또 푸가는 스페인어로 도주, 도망, 도피 등의 뜻도 지니고 있다. 배 연출은 "'푸가'는 어디론가 '간다' '달린다'는 뜻이에요. 여러 개의 주제가 시간 차를 두고 반복하는 구조를 가리키죠"라고 설명했다.

"보통 네 성부로 나뉘는데, 한 주제가 시작을 하고 변주되면 다른 주제가 이어서 시작·변주되죠. 광주를 겪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이 푸가처럼 변주되고 반복된다고 봤어요. 그 구조가 끊나지 않는 거죠."

이번 작품은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와 배 연출이 이끄는 공연창작집단 뛰다가 함께 제작했다. 뛰다는 '고통에 대한 명상', '바후차라마타', '이 슬픈 시대의 무게' 등 고통의 사유와 방법론이 집약된 작품들을 선보였다.

'휴먼 푸가' 역시 마찬가지다. 공병준, 김도완, 김재훈, 박선희, 배소현, 양종욱, 최수진, 황혜란 등의 퍼포머와 제작진은 지난 1월 한 작가와의 만남 이후 폭력의 모습을 제대로 마주보기 위해 몇 차례 광주를 방문해 자료를 조사했다.

배 연출은 "우리는 사실 광주 분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았는지 잘 몰르잖아요. 배우들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몸의 감각이었다"고 짚었다.

"고문을 받았던 지하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것, 고문을 받다가 이송돼 치료를 받은 병원의 병실···. 체험하지 않으면 발화괴지 않은 현실을 인식하고자 했어요. 그 공간에서 지켜보는 것이 중요했죠."

한 작가의 원작은 2인칭 '너'를 서술 주체로 삼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공연은 이를 완전히 해체하지만 텍스트는 대부분 그대로 가져왔다. 배 연출은 원래 텍스트를 신뢰하지 않는다. 대신 배우들의 몸을 믿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였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텍스트를 하나도 바꾸지 않기로 했어요. 원작의 글자 하나 하나에 받은 감각이 강렬했기 때문에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뭔가에 위배되는 듯했죠."

그런데 한 작가의 작품은 다른 장르로 옮겨지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작인 '채식주의자'가 동명 영화(감독 임우성·2009)화된 정도다.

다만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받은 '소년이 온다'는 지난 6월 '더 보이 이즈 커밍(The Boy is Coming)'이라는 제목으로 폴란드 스타리 국립극장에서 공연됐다. 국내에서 '소년이 온다'는 지난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주간'에서 일부가 발췌돼 입체낭독극으로 선을 보였을 뿐이다.

오래 전부터 한 작가와 예술적 공감대를 만들어온 것으로 알려진 배 연출은 한 작가의 작품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올리지 않을 수 있어 공연을 결정했다.

특히 원작에서 '너'로 불리는 동호가 구체화되지 않도록 한 작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배 연출은 "사실 동호는 지금 이 순간의 관객들일 수 있고, 퍼포머일 수 있어요. 정해지지 않는 무엇이어야 할 것 같은데 동호의 얼굴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죠"라고 전했다.

이번 공연에서 남산예술센터 객석은 텅 비운다. 대신 무대 위에 또 다른 런웨이 무대를 만들고 그 양쪽에 객석을 깔았다. 관객 입장도 원래 정해진 공간이 아닌 배우들이 드나드는 지하 구조를 통해 가능하다.

배 연출은 "퍼포머들이 체험하고 겪은 것들을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관객이 한 공간 안에 둘러싸여야 한다는 것이 이 작품이 가져야 할 방식이라고 생각했죠. 더 많은 관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공간보다 우리가 공연할 수 있는 방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한편, 9일 공연 뒤에는 '더 보이 이스 커밍'을 연출한 폴란드 연출가 마르친 비에슈호프스키, 배 연출이 관객과 대화한다. 당일 공연을 관람한 관객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이규승 서울문화재단 홍보팀장은 "남산예술센터는 내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이해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과 가치를 확산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양국에서 제작한 공연을 교류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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