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호남 민심은 이곳에서 알수있다···최고의 정치 포토존

입력 2019.10.18. 15:33 댓글 0개
[광주스토리100]양동시장

선거철이 되면 광주를 찾아오는 정치인들이 들리는 단골코스가 있다. 5․18묘역과 양동시장이다. 정치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양동시장에 와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이곳이 바로 호남 최대의 시장, 지역 민심의 집결지이기 때문이다. 

80년 5월 양동시장 상인들은 주먹밥을 쌌다. 남광주 시장에서, 대인시장에서 상인들이 시민군을 위한 주먹밥을 쌌듯이 호남 최대의 시장인 양동시장과 양동 복개상가 상인들은 돈을 걷고 주먹밥과 김밥을 싸서 시민군들과 한마음이 되어 움직였다. 시장이 물건만 거래되는 곳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곳임을, 시민공동체의 한복판임을 보여준 것이다. 

살기 힘든 시절, 삶의 구심점이 되던 시장 

일제 말엽, 양동시장은 전시경제 체제의 강화로 모든 상점이 기업정비를 당하고 시장의 유통기능마저 전면적으로 통제되어 사실상 폐쇄 상태였다. 기업들은 일부 물자배급소를 제외하고는 거의 문을 닫았고 모든 매매행위가 규제되었다.

옷감인 광목이나 쌀은 물론 비누 한 개, 고무신 한 켤레도 마음대로 거래하다 들키면 경제사범이라 하여 중형을 면치 못했다. 이때 이른바 '야미'라는 해괴한 유통용어가 생겨났다.  

양동시장-광주 뿐아니라 호남의 대표시장으로 꼽히는 양동시장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본래 광주교 아래 백사장에 있던 큰 장과 작은 장이 광주천 직강공사로 합쳐져 옛 태평극장 앞으로 옮겨졌으며, 1940년 다시 양동으로 이전했다.

'야미'란 '암거래'를 뜻하는 '암'의 일본어 발음으로 사람들은 단속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생필품 구입을 야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모든 상거래는 위축됐고 또 사치 배격과 식량 절약이라 하여 요정은 물론 대중식당까지 폐업 상태라 호사스럽던 기생, 여급들마저 일자리를 잃고 초라한 차림으로 뒷골목을 방황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잃었던 우리 이름과 말, 자유와 고유한 우리 겨레의 '만남의 광장'이던 장날을 되찾게 되었다. 

흩어졌던 사람들,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북한에서, 중국에서, 만주에서, 일본에서, 남양군도에서 고향으로 돌아왔고 양동시장도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낯익은 장꾼들, 안부를 몰라 안타까워했던 이웃들이 모여들었다. 살아서 다시 만나는 기쁨과 그동안의 목멘 사연들, 그리고 만리타국에서 불귀의 객이 된 벗들의 가슴 아픈 뒷이야기들로 장터는 기쁨과 설움으로 복받쳐 올랐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찾아와 구성진 '장타령'을 들려주었고, 장 모퉁이에는 신나게 노래하고 북치는 약장수와 투전꾼들도 눈에 띄었다. 맛보기 등 인정어린 장터 풍경이 봄날 눈 녹듯이 되살아나고 마치 잔칫날 아침처럼 들떠 장 보러 오는 이들과 그동안 공출을 피해 숨겨두었던 물건들이 들길과 산길을 타고 장터로 모여들었다.

해방을 넘어 장다운 장으로 재도약 

해방 이후 어느 장터를 막론하고 농산물 외에 일본군의 비축물자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와 장바닥은 온통 혼란스러웠다. 양동시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충장로 상가가 정상을 되찾지 못했던 터라 더욱 그랬다. 충장로에 점포를 차릴 자금도 없고, 설령 차린다고 해도 상품을 공급해 줄 공장이 없었다.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는 판이어서 즉석거래가 활발한 양동시장은 그런대로 활기가 넘쳤다. 더구나 혼수나 제수 등 집안의 대소사에 필요한 물품 구입은 양동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물건을 사고팔려는 사람들이 대거 양동시장에 몰리는 데다 해방 직후의 정치사회적 혼란 등으로 무질서하기 짝이 없었기에 겉으로 보기엔 활발해 보였을지는 몰라도 시장 내부 사정은 혼란스러웠다.

같은 물건이라도 가게에 따라서 값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조잡한 수공품들로 품질이 고르지 못했다. 계량에 대한 관념도 희박한 데다 저울을 비롯한 도량형기가 귀해서 어림짐작으로 분량을 가늠하여 거래하는 형편이었다. 여기에 무엇보다 혼란을 빚은 것은 업종이나 품목별로 나뉜 점포 배열의 관행이 무시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종래에는 포목, 황아전(댕기, 허리끈, 주머니끈, 대님, 갓끈, 안경 등을 취급하던 가게), 양품 잡화, 조끼와 피복, 건어물, 고무신, 사기그릇, 유기그릇, 옹기 등으로 점포가 배치되어 있던 것이 이제는 아무나 먼저 자리를 잡는 사람이 임자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포목점 한복판에 건어물전이, 유기전들 사이에 생선가게가 들어서는 등 무질서한 광경이 연출됐다. 이는 해방 직후에 어디서나 볼 수 있던 혼란상으로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데다 생계를 위해 전업 상인이 아닌 사람까지 장터에 자리를 잡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혼란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들어서야 가까스로 바로잡게 되었다.

미 군정하의 행정당국이 시장의 질서회복에 나섰고 시장 상인들도 양동시장 번영회라는 자율조직을 결성했다. 양동시장 번영회의 초대회장에는 한정섭, 부회장에 손영관, 그리고 그 밑에 업종별 책임자들이 있었다.

번영회는 첫 사업으로 가장 시급한 당면문제인 업종별, 품목별 점포 배열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작업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제각기 무질서하게 자리를 잡은 상인들이 기왕에 눌러앉은 점포의 연고권을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양동 청과시장-양동시장에는 340개의 점포가 있다. 가~라 구역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가와 나 구역에서는 공산품, 다 구역에서는 수산물, 라 구역에서는 채소류를 주로 판매한다. 시장 서쪽은 이른바 '닭전머리'로 불리며 닭과 오리를 판매한다.

광주시 당국은 상공계 직원들을 보내 행정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 했으나 도무지 해결의 가닥을 추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정섭과 손영관이라는 양동시장의 두 거인이 강력한 리더십과 공정성 그리고 의리와 인정으로 이 문제를 처리했다. 이들은 상인들을 설득하여 업종별 위치를 정하고 같은 업종 안에서도 개별 점포의 위치는 추첨으로 결정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번영회 중심으로 시장 상권 성장 

이렇게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나자 번영회가 두 번째로 착수한 사업은 점포수를 늘리는 일이었다. 366칸이던 양동시장의 점포 수로는 해방 후 호경기를 타고 몰려든 상인들을 다 흡수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시당국이 예산을 들여 점포를 확장하기에는 재원이 너무 빈약했다. 생각다 못한 번영회는 시당국과 협의해 자체 자금으로 시장점포를 증축하되 이를 시에 기증하여 사용하기로 합의했고 증축자금은 상인들이 각출, 세 단계로 나눠 20칸씩 목조 점포 60칸을 증축했다. 

점포 증축에도 불구하고 시장 주변의 노점상들이 날로 불어나고 있을 뿐 아니라 시장 내의 노점상들도 한사코 시장 어귀나 주변으로 옮겨 나가고 있었다. 시장의 번영을 위해서는 이들을 시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급선무였다.

번영회에서는 노점상을 시장 안으로 유도하기 위해 설득하는 한편 기존 입주 상인들이 20~30명씩 짝을 지어 장을 순회하며 주변 상인들을 시장 안으로 끌어들었다.

다음으로 번영회는 시장의 질서를 확립하고 잡초처럼 자라는 폭력배와 선량한 상인들을 등치는 날치기꾼들, 사기꾼들을 소탕하는 일에 나섰다. 당시 시장에는 몇몇 경찰관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광주 인근인 화순, 장성, 담양, 나주 등지에서 주먹패들은 거의 양동시장에 모여 들었으니 속담에 '광주장에서 뺨 맞고 화순 너릿재에서 눈 흘긴다' 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 같은 난장판 속에서 한정섭과 손영관은 불상사를 최대한으로 막았으며 상인들이 마음 놓고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시장을 찾는 손님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신뢰도를 잃지 않게 하는 일에 힘썼다. 

그때 시장 상인으로 출발해 충장로의 거상으로 대성한 사람들로는 태평극장의 장한익을 비롯하여 충장로 5가의 이길수, 선용규, 김재묵, 서우진 등이 있었으며, 사정시장 출신으로는 면포도매를 독점한 장한섭, 면사의 김기권이 있었다.

이때 양동시장의 가장 큰 거래품목은 곡성, 보성, 화순, 나주 등지에서 생산된 마포와 백목白木(무명베)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이 양동시장에 집하되어 전국에 공급되었다.

양동시장의 풍경

양동시장 풍경 가운데 하나로 주막을 빼놓을 수 없다. 북한과 전국 곳곳에서, 그리고 중국, 만주, 일본, 남양군도 등 각지에서 돌아온 아낙네들이 장사에 경험이 있든 없든 생계수단으로 주막들을 차렸는데 해방 후에 여기저기서 모은 것들이라 그릇도 가지각색이지만 모처럼 푸짐한 우리 고유의 음식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참기름과 고추장을 듬뿍 넣은 비빔밥과 푸짐한 곰탕, 설렁탕은 물론 거기에 상해나 베이징, 하얼빈, 일본, 남양군도, 함흥, 평양 등 말하자면 아시아와 전국의 음식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어쩌다 주막 주인들이 손님들과 술잔을 주고받다가 취흥이 나면 목청을 뽑아 올리는데 주막마다 잃었던 우리 노래가 목청껏 터져 나오고 일본과 중국, 남양군도에서 부르던 노래들까지 섞여 가관이었다. 세속적인 서민 문화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주세법이 엄하지 않아 술을 마음대로 빚을 수 있었으며 주류는 거의 청주 일색이었는데 각기 집에서 빚어오는 술이라 술맛도 각색이었다.

그래서 웬만한 술꾼이라면 장날을 손꼽아 기다렸으며 장날이 오면 평소의 단골집을 뿌리치고 장터에 나가 술을 마시는데 그도 정해진 주막에서만 마시는 게 아니라 한 집에서 안주 한 접시에 몇 잔씩 들면서 장바닥 주막을 돌게 마련이고 친구들과의 약속이나 계모임도 장날 오후를 택했다.

각설이의 옛 정취와 품바의 복원

이 무렵 양동시장 풍경 속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이 각설이 타령이었다. 원래 각설이 타령은 걸인들이 네다섯 명씩 짝을 지어 장터나 상가를 돌며, 동냥을 청하는 흥겨운 타령으로 세속풍정을 풍자적으로 엮은 표현들이 많았다.

예로부터 걸인들 중에는 관헌을 피해 숨어 다니는 반가의 한량이나 서출들이 더러 섞여 있었고 양가의 집안에서 내침을 당한 나환자들도 많았다. 그래서 각설이 타령에 나오는 강도 높은 시사 풍자는 이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일명 '품바'라고도 불리는 각설이 타령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가사가 다양한 변천을 거쳐 오면서 최하층민 문화의 한 자락을 이루었지만 1950년대 자유당 때를 고비로 1960년대부터는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 광주민학회가 이 '품바'를 복원하여 공연을 가졌는데 그 반응이 대단했다. 이를 계기로 '품바'는 서울 중앙무대를 비롯 전국을 휩쓸게 되어 그 명맥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허어 저얼 씨구씨구 들어간다

어얼 씨구나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어허허 이놈이 이래도오 정승 판서 후레 아들놈

팔도감사 마다하고 돈 한 푼에 팔려서

각설이로만 나섰네 한 푼 벌기가 땀난다

지리구 지리구 잘한다. 허어 품바품바 잘한다

양동통닭-프랜차이즈 후라이드 치킨이 배달음식 시장을 점령했어도 광주에서는 여전히 옛날식 튀김닭을 판매하는 '양동통닭'이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닭전머리 양동통닭, 광주만의 치킨브랜드 

장타령은 사라졌지만, 장은 남았다. 호남 제일의 시장답게 여전히 홍어, 낙지, 호남땅 온갖 산물들이 이 장을 통해 팔려나간다. 하지만 장을 찾는 이들은 나이든 이들과 업소 운영자들이 더 많다. 생식품 외에 업종은 더 타격이 더 크다. 한때는 정말로 큰 장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던 양동시장 이불집이나 혼수용 한복집, 가구점들도 예전 같지 않은 매출을 견디고 있다. 

세월이 흘렀어도 새로운 전성시대를 구가하는 것은 시장 초입 닭전머리의 양동통닭이다. 브랜드 치킨 사이에서도 '양동통닭'은 옛날식 튀김닭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의 사랑에 힘입어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시멘봉투라 불리던 누런 종이포장은 산뜻한 종이박스로 바뀌고, 똥집이나 발, 고구마를 튀겨서 담아주는 옛날식 서비스는 새로운 생존전략으로 평가받는다. 양동통닭처럼 양동 브랜드로 승부하는 다른 업종들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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