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류동운 열사 비석, 이대로 둬선 안된다"

입력 2019.10.02. 18:00 수정 2019.10.02. 18:00 댓글 0개
애틋한 추억 담긴 광주공원 내에서
시민들 눈길 잘 띄길 바라는 유족측
“광주시 설명과 달리 사유지 아니다”
고 류동운 열사

5·18민주화운동 당시 집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옛 전남도청으로 돌아가 윤상원 열사와 나란히 죽음을 맞이했던 류동운 열사의 유족이 추모비를 재정비 해주길 바란다는 희망을 나타냈다.

류동운 열사의 동생인 류동인(57) 대구성결교회 집사는 지난 26일 취재진과의 통화에서 "추모비가 세워진 공간은 원래 광주시 땅인 만큼 광주시가 의지만 있다면 형님의 비석을 재정비하는 것이 가능하다"며 "광주공원 일대가 민주화 운동가였던 형님과 아버님의 흔적이 가득한 곳인 만큼 가능하다면 그 주변에 조성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류씨는 형님을 추모하는 비석이 현 위치에 자리잡게 된 것에 대해 "우리 가족에게 뜻깊은 장소였다. 그러나 안전문제나 시민 접근성 등에 대한 지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밝혔다.

2007년 류 열사의 추모비는 성도들의 성금으로 그 해 5월 26일 당시 신광성결교회 입구였던 현 위치에 세워졌다. 교회를 북구로 이전하면서 추모비는 현재 장소에 남았다. 5·18과 관련된 장소였기 때문에 지금 위치가 고인의 뜻을 더 기릴 수 있을 거란 기대에서다.

류 열사의 아버지 고 류연창 목사가 1971년 만든 신광성결교회는 처음부터 광주공원 내에 위치했다. 공원 내에 건물을 건축할 수 있었던 배경을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부터 광주시가 소유한 부지였다고 한다.

벽돌로 된 단층 건물 근처에는 류 열사 일가족이 기거하는 일본식 가옥이 있었고 수업하는 공간도 있었다.

1970년대 말 박정희 유신독재에 투쟁하는 민주화 열사들에게 류 목사는 기꺼이 회의 공간을 제공했고 함께 숙식하기도 했다.

류 목사는 광주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끄트머리에 한그루 석류나무를 심었고 류 열사의 추모비는 이 나무 아래에 세워졌다.

류 열사가 사망한 이듬해 어머니는 "동운이 생각이 밟혀서 도저히 못살겠다"며 괴로워했고 일가족은 그렇게 대구로 돌아가 그곳에서 38년을 살아왔다.

류씨는 형님을 민주화운동가였던 아버지보다 더 옳고 그름이 분명한 조숙한 성정을 지녔고 음악과 시에도 능통해 상을 여러번 수상한 예술인, 각종 무술 단증 10개를 보유한 스포츠맨으로 기억한다.

광주공원 깡패들이 신도들을 괴롭히자 고교생의 몸으로 7명을 상대로 싸워 지지 않을 만큼 강한 기질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류 목사도 경주 양남 출신으로 일찍이 일본 유학 시절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우연히 찾게 된 광주가 자신의 성향과도 잘 맞자 1971년 광주공원에 선결신광교회를 세우고 전남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지난 7월 5일 91세의 일기로 영면한 류 목사는 지난 9월 19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 이장되면서 광주에 묻히게 됐다.

앞서 류 열사는 국립5·18민주묘지 2-45에 안장됐다.

이처럼 가족들도 추모비 정비를 바라는 가운데 5월 인사들을 중심으로도 류 열사 추모비가 새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안성례 전 오월어머니집 초대관장은 "류동운 열사는 아버지 류연창 목사를 시작으로 온 가족이 민주화를 위해 투신한 일가다"며 "이들이 류 열사를 잃고 광주를 떠난 뒤 겨우 하나 남은 추모비를 시민들이 찾을 수도 없다는 건 류 열사의 희생을 외면하는 처사다. 표정두 열사의 사례처럼 류 열사의 추모비도 적절한 장소를 찾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서충섭기자 zorba85@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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