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누구라도 찾고 싶은 책 세상 만들어 갈 것"

입력 2019.09.16. 18:48 수정 2019.09.17. 18:40 댓글 0개
[오래된 공간의 귀환] 1.책마을 해리
“세상을 조금이라도 밝게 할 수 있다면,
멋진 흔적 남길 수 있다면 아름다운 일 아닐까요"
책마을 해리의 대표 이대건 촌장.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동네 아이들 교욱을 위해 기부했던 초등학교가 폐교돼 상업시설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자 이를 매입,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책마을 해리'를 설립해 가꾸고 있다.

수명이 다한 화력발전소가 가장 핫한 현대미술관으로 탈바꿈한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 빌딩 숲 뉴욕 맨해튼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낡은 철도에서 도심 속 정원으로 거듭난 '하이라인'

오래된, 혹은 버려진 건물이나 공간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경제를 살려내면서 이제 전략적으로 폐공간이 문화의 이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가 '낡음'을 무기로 도시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지난달 언론재단 광주지사가 낡은 공간을 문화적으로 재생시킨 국내 사례 탐방을 마련했다. 그중 몇 곳을 소개한다.

◆도축장 될 뻔한 폐교, 전국 최고 책마을로

"저는 책 농사를 짓는 책 농사꾼입니다. 이곳 책마을 해리는 읽는 사람이 쓰는 사람으로 변신하는 마법의 공간입니다."

책마을에는 개인과 기관들이 기부한 17만여점의 장서가 있다. 책마을이니 책 읽기는 기본이다.

'누구나 책, 누구나 도서관', '책마을 해리'(이하 책마을).

초등학교 부지에 들어선 책마을은 규모가 상당히 커 공공기관이나 법인이 운영할 듯 한 인상을 준다. 더구나 전국적 유명세를 생각할 때 더욱 그럴것이라는 편견이 우세하다. 한 사람의 꿈과 열정이 만들어낸 여정의 공간이라는데 이르러서는 책마을의 전문성이나 대중의 사랑보다 더 큰 놀라움을 안긴다.

이곳은 이대건(48) 촌장의 선대 인연과 세상에 대한 꿈이 어우러진 공간이다. 대표라는 직함 대신 촌장이란 용어에 그의 꿈의 색깔이 묻어난다.

어린이들 눈높이에 맞춘 도 다른 서가.

◆증조할아버지 기부했던 폐교 매입

책마을은 전북 고창군 해리면 이씨 집성촌인 월봉마을에 있다. 2001년 폐교가 된 나성초등학교를 이 촌장이 매입, 2012년 문을 열었다. 이 지역 유지였던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1936) 때 후세교육을 위해 기부했던 곳이다. 폐교 후 도축장이 들어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던 이 촌장이 2006년 사들였다.

오래된 우체통. 입구 카페서 옆서를 구입해 편지를 부치면 1년 후 배달된다.

인연이란 이런 것인가. 폐교 소식이 들려오던 2000년대는 전자책 등장으로 종이책이 소멸의 위기감이 팽배해있던 때다. 출판계에 몸담고 있던 이 촌장은 '책이라는 감성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릴수도 있겠구나. 누군가 그 감성을 붙들어 전해주면, 감각으로 경험하면 좋을텐데...' 막막함과 막연한 그리움을 갖고 있던 즈음이었다. 고향을 오가며 폐교를 바라보던 40대의 반 서울 남자는 부인, 뜻을 함께한 직원 3명과 함께 전격적으로 이주를 단행했다.

◆뻔한 건 안돼, 해리만의 색깔을

자청해서 갇히고자하는 글감옥. 한권의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다

책마을은 17만여권의 장서와 다양한 공간과 프로그램을 자랑한다.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 나무 집, 글감옥, 공연장 등을 갖추고 있다. 책마을의 다양한 캠프와 프로그램은 빼어난 전문성, 감성으로 전국적 명성을 자랑한다. 예약 없이는 책마을 프로그램을 구경하기도 어렵다.

여기에는 폐교의 문화공간화 이상의 뭔가가 있다. "유럽의 다양한 책마을들은 대부분이 책을 판매하는 것이 주기능이라는 점에서 다 비슷비슷하다"는 이 촌장은 "유럽과는 다른, 해리만의 색깔을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책과 독자의 관계를 동등하게 만드는 일이다. 도서관은 독자가 단순히 소비자에 머문다. 하지만 책을 펴내고 책으로 다양한 일을 만들어가면 대상이던 독자는 단숨에 생산자, 책 농사꾼이 되는 것이다.

책마을 해리 입구 플라타너스 나무위에 지어놓은 나무집. 아이들에게는 낭만을 어른들에게는 유년의 추억을 선사해준다.

◆책과 관련된 모든 것이 가능한 곳

이곳에서는 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 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지 만들기, 닥돌(한지 재료인 닥을 펴서 말리는 돌) 체험, 그림책학교, 시인학교, 만화학교, 책 영화학교 등 책에 관한 거의 모든 프로그램들이 운영된다. 지난 2016년부터 책을 주제로 한 영화제도 운영하고 있다. 책 영화제는 마을축제다. 할머니 할아버지 관객을 위해 인근 학생들이 특별 더빙한 영화는 영화제의 백미다.

누구나 책. 학생이나 교사들이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는 것은 기본이다. '누구나 책'의 압권은 '밭메다 딴짓거리'라는 프로그램이다. 70∼80대 할머니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려 책을 냈다. 할머니 그림 솜씨가 얼마나 빼어났던지 '원화'를 확인하겠다고 찾아왔다. 원화의 매력에 더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누구나' 책을 낸다고 그 질적 수준을 의심해서는 큰 코 다친다. 고창여고생들이 경주지진을 소재로 펴낸 '흔들리며 흔들리지 않고'는 지난 2017년 세종도서(우수출판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출판된 책만 90권이 넘는다. 이 중에는 3쇄를 한 책도 있다.

◆동네주민들 삶의 터전으로

수천 수만가지의 책을 만나고, 누구라도 책을 펴낼 수 있으며, 책에 관한 환상이 실현되는 곳, 무엇보다 월봉리 주민들의 삶에 도움되기. 해석하자면 책마을을 중심으로 월봉마을 잘살게 하기.

책마을이 개인 소유지만 지속가능성을 인근 동네사람들과의 공생에서 찾는다. 이 촌장은 "모든 것이 서울에 집중돼 있지만 지역의 언어와 이야기는 이 틀에 가둘 수 없는 영역"이라며 "지역 이야기야말로 생명력이고 경쟁력"이라고 설명한다. 인근 해리 바닷가를 소재로 한 바닷가 프로젝트, 동학의 본고장으로서 동학에 관한 기획 등 지역에 관한 연차별 계획을 추진 중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밝게 할 수 있다면, 멋진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너무 아름다운 일 아닙니까. 지역에 스며서 가치를 찾아가고, 누군가 알아주고, 함께 하면 되는 것 이지요"

운영은 어떻게하느냐는 애정하는 질문에 이 촌장이 던진 대답이다.

고창=조덕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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