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입력 2017.07.26. 08:30 수정 2017.08.22. 14:42 댓글 0개
손정연 아침시평 언론인/전 한국언론재단 이사

‘시국사건 1호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가 우리 사회에 던진 메시지다. 유신시절 반공법위반 혐의로 형을 살았던 그가 당시 판결이 잘못됐다고 재심을 청구했고, 법정은 42년 만인 지난달 22일 무죄판결 내렸다.

그가 지은 죄란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인 ‘유럽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김규남 의원 등을 변론하고 사형되자 애도하는 글을 썼던 것. 당시 법원은 그의 글이 ‘북괴를 이롭게 했다’며 유죄 판결했다. 그러나 2015년 사법부는 ‘유럽 간첩단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최종 확정했다. 지난 6월, 한 변호사 필화사건도 자연스레 무죄 판결 받았다.

왜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닐까?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 책이 유독 우리나라에서 많이 팔렸다. 2010년 출판돼 2012년까지 무려 130만부 이상 팔렸다. 인구가 6배나 더 많은 미국에서도 고작 10만부 정도 팔린 책이 왜 우리나라에선 13배 이상이나 팔렸을까.

당시 이명박 정권 아래서 일어났던 사회적 이슈를 스크린하면 이유를 알 수 있다. 기억을 되돌려보자. 집권 초,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강행에서 비롯된 ‘광우병 파동’서 MB정권은 무차별 연행으로 촛불집회 시민들과 맞섰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부대들에게까지 공권력을 행사 했다. 가족들 먹거리 안전성 확보를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국가는 소통대신 주먹을 휘둘렀다.

이어 터져 나온 용산 참사, 4대강 사업,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국정원의 댓글 공작’ 등 셀 수 없다. 요즘 대두되는 소위 적폐청산의 가까운 근원이 되는 사건들이다.

인권과 소통에 공을 들인 DJ정권, 참여정부 10년이 끝나자마자 상식과 원칙이 왜 이 나라에서 통용되지 않는 것일까? 국민들은 의아해했고, 그 이유를 알고자 했다.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뿌리 내렸다고 믿었는데 정권이 바뀐 것만으로 왜 갑자기 상식과 원칙이 통하지 않는 것인가? 정의가 작동되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원하는 상식과 원칙은 무엇이고, 또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나라는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문재인 정부를 태동케 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도 더듬어 올라가면 한승헌 변호사의 한탄 어린 메시지에 맥이 닿아 있다.

역사에는 ‘만약’이란 단어란 없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정권연장의 3선 개헌을 위해 공안정국 조성을 목적으로 조작한 ‘유럽 간첩단 사건’때 사법 정의가 살아있었다면 역사는 다시 써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안통치에 실패했다면 3선 개헌은 저지됐을 것이고, 유신 독재가 없었다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사유화도 없었을 것이다.

왜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닐까? ‘대통령 탄핵’ 촛불혁명이 그 답을 말해주고 있다. 정의 실현은 즉각적이고 현재적이어야 한다는 답이다.

정권의 권력이 정의롭지 못할 때 사회가 부담해야 할 정치사회적 비용은 너무 크다. 국민들이 느끼는 고통에 비례해서 커진다. 유신독재, 전두환 철권통치, MB·박근혜 정권에서 우리는 너무 비싼 학습료를 지불했다. 37주년이 되도록 진상규명이 안된 ‘5.18’로 인해 광주시민들이 겪는 고통과 분노의 정치사회적 비용 또한 마찬가지다.

한승헌 변호사의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는 메시지는 그래서 함축하는 바가 크다. 유시민 작가의 ‘국가란 무엇인가’ TV수업을 듣고 한 블로거가 한 줄로 요약한 내용이 눈에 띈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망한다.” 통찰력 있는 명제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 국민을 들쥐라 부르고,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추가조사를 거부한 대법원장, ‘탄핵 불복’ 류석춘 혁신위에 곪아가는 한국당, 국민의당 ‘제보 조작’사건 …. 합리적 사회로 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다.

EBS에서 12차례에 걸쳐 소개된,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 특강을 듣고 마음에 들어온 한 단어가 있다. ‘양심’이었다. 양심이 죽은 곳에 정의는 설 자리가 없고, 양심이 살아 있을 때 개인, 조직, 사회는 살아 있었다.

‘양심과 정의’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는 사회’-. 적폐청산이 산적한 우리로선 새겨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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