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칼럼> 풍년의 역설

입력 2019.08.26. 18:29 수정 2019.08.26. 18:29 댓글 0개
도철의 무등칼럼 무등일보 경제에디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음력 8월15일 둥그런 보름달 아래 옹기종기 모인 가족들. 한쪽에서 송편을 빚고 다른 한쪽에서는 부침개 지짐 소리가 요란하다.

평소에 잘 씻지 않는 땀범벅 아이들도 상큼하고 아버지, 어머니도 잠시 지친 몸 쉬어간다.

매년 그렇지만 한가위까지 쉽지는 않다.

지난해 수확이 끝난 논바닥에 퇴비뿌려 놓고 한겨울을 지낸 뒤 봄 바람에 땅이 녹아내리면 소를 몰아 쟁기질로 땅을 뒤엎는다.

어렵게 논에 물을 받아 준비하고 볍씨 뿌려 소중히 키워낸 모가 튼실해도 써레질할 쟁기 소가 없어 애가 타길 여러 번이다.

여린 초록 벼 잎들이 살랑 바람에 휘날릴 때면 철없이 맑기만 한 하늘에 지독한 봄 가뭄이 시작이다. 창고 구석에 세워놓은 물 지게 꺼내 손질하고 손에 물집 터지도록 논두렁 오가다 보면 흐르는 땀인지 물통의 물인지 온 몸은 젖어들고 후들후들 사지가 떨려온다. 며칠을 길어 나른 정성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빗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반가운 마음에 입 벌려 받아먹는 빗물이 꿀 맛이다. 가득 찬 논물에 풍년 기대도 잠시, 어느새 여름 태풍 몰려와 농작물은 쓰러지고 벼논은 물에 잠긴다.

별다른 대책 없이 손에 쥔 삽자루로 겨우 버텨내면 습도 높아진 논밭에 병충해가 극성이고 뜨거운 햇볕아래 잡초 뽑으며 알곡 지켜내면 참새떼가 극성이다. 훠이 훠이 지난해 세워 둔 허수아비 고쳐들고 깡통 두드리며 여름 끝자락을 보내면 시꺼먼 얼굴에 깡마른 아비와 자식들의 눈동자는 더욱 까맣다.

매년 8월 18일은 쌀의 날이다. 한 톨의 쌀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88번(八十八)의 손길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에서 정해진 날이다.

사실 농민들은 WTO협정과 각 나라 별로 협정을 맺는 FTA 체결 등 국가 간 협약에서 많은 피해를 입어 왔다.

공산품 수출이 주요 산업인 우리나라에서 농업에서는 많은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배추부터 김장용 배추, 봄철 마늘과 양파, 대파 등은 물론 각종 과채류 값이 폭락하고 보리 값마저 떨어졌다.

아이러니 하게도 과채류 값 폭락의 원인은 '풍년'이란다. 농민들은 더이상 할 말이 없다. "이제 어쩌라고?"

도철 경제부 부장 douls18309@srb.co.kr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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