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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피족의 시조, 출판인겸 저술가 폴 크라스너(87)별세

입력 2019.07.22. 08:37 댓글 0개
1960년대 저항문화그룹 '이피'족 (Yippies) 창시
돼지를 대통령에 선출 등 기행 앞장
【데저트핫스프링스( 미 캘리포니아주)= AP/뉴시스】 1960년대 이피족의 시조 가운데 한 명이며 저술가 코미디언 저널리스트였던 폴 크라스너가 2009년 77세 때 언론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그는 87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주 자택에서 타계했다.

【서울=뉴시스】차미례 기자 = 미국의 출판업자 겸 저술가, 진보적인 정치운동가 겸 1960년대 저항문화의 기수, 히피와 사회주의자들의 사이에 위치하는 '이피족'이란 이름의 장난꾼 그룹 선봉장이었던 폴 크라스너가 캘리포니아 남부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그의 딸 홀리 크라스너 도슨이 21일 (현지시간 ) 발표했다. 향년 87세.

크라스너는 말년에 고향 데저트 핫스프링스에서 살아왔으며 최근에는 병세가 악화되어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있었다고 딸 도슨은 밝혔다. 그러나 어떤 병이었는지 병명은 공개하지 않았다.

크라스너는 1960년대를 풍미한 저항문화의 집단 이피족의 창시자로. 제리 루빈, 애비 호프먼 등과 함께 정식 이름 "청년 국제당'를 결성했다. 이들의 활동은 돼지 한 마리를 대통령으로 선출해 민주당 전당대회를 조롱한다든지, 뉴욕증권거래소의 장내에 달러 지폐 뭉치를 뿌리는 등의 기행과 장난으로 한 때 악명을 떨쳤다.

하지만 크라스너는 호프먼과 루빈이 1968년 민주당전국대회에서 돼지를 가지고 폭거를 했던 이른바 "시카고 7인방"의 대원으로 가담했을 때 거기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1960년대가 끝날 무렵 이피족 멤버들은 모두 망각의 늪속으로 사라졌지만 크라스너는 끊임없이 변신을 계속하며 대중연설가, 프리랜서 작가, 단독 스탠드업 코미디언, 명사 인터뷰어, 거의 12권의 책을 써낸 저술가로 맹렬한 활동을 해왔다.

한 동안 반문화 활동을 함께 했던 오랜 친구이자 동료 웨이비 그레이비는 크라스너에 대해 "그는 시간을 낭비한 적이 없다.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은 그 시간에 파묻혀 잊어지기 마련인데, 그는 계속해서 하나 하나 다른 일을 해 나갔다"고 말한 적이 있다.

크라스너는 노먼 메일러, 조셉 헬러 같은 유명작가들을 인터뷰했고 앤드류 브라이트바트 (브라이트바트 뉴스 창설자)같은 극우파 석학 등 다양한 명사들을 인터뷰했다. 진보적이고 파격적인 크라스너와 모든 문제에서 의견이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극우파들조차도 그의 유머감각과 탁월한 언어적 재능에 감탄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거칠고 야한 연설, 오락을 위한 마리화나 사용, 사적인 음담패설로도 명성을 떨치면서 코미디언 기질을 발휘한 크라스너의 저서들에는 "영혼을 위한 마약 스토리" " 정신세계로의 사이키델릭 여행" 같은 파격적 제목의 책들도 포함되어있다.

그는 유명인사들고 코미디언 그루초 맑스, LSD의 티모시 리어리, 작가 켄 케이시등 수많은 명사들과 함께 LSD를 복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저서 가운데에는 기사로 옮기기 어려운 제목의 외설 서적도 여러 권 있다. "포르노 계곡의 파견자. 추잡함에 대한 찬양" "누가 외설을 말하는가: 현대 미국의 정치, 문화, 그리고 코미디" 같은 책은 그 중 점잖은 제목들이다.

크라스너가 남긴 자서전으로는 " 어떤 미치광이 발광자의 고백: 저항문화의 불운한 사건사고 " (Confessions of a Raving, Unconfined Nut: Misadventures in the Counterculture)가 있다. 이 제목은 한 때 자기에게 좋은 기사를 써줬던 어떤 잡지사의 편집장이 나중에 한 말에 격분해서 써보낸 편지의 일부 인용문에서 따온 것이다.

그 편집장은 "크라스너를 사회적 반항아로 분류하는 것은 너무 귀엽게 봐주는 것"이라며 "그는 미치광이에다가 발광하는 통제불능의 정신이상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크라스너는 자신은 실제로는 사람들을 웃기는 와중에 정치활동가로서의 양심에 어울리는 비판의식을 첨가하는 일종의 풍자가 겸 코미디언이라고 AP통신에게 밝힌 바 있다.

그는 낙태가 대부분의 주에서 불법이었던 1960년대 초부터 여성들을 위한 비밀 임신중절 소개소를 운영했다고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다. 풍자가에서 활동가로 변신한 것이라고 그는 자평했다.

그는 6살때 바이얼린 연주로 카네기홀 무대에 섰을 정도로 음악에도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곧 연주를 포기했고 평생 강의나 코미디 도중에 장난삼아 바이얼린 연주를 하는데 그쳤다.

뉴욕시립대학인 바루크 칼리지에서 언론학을 전공한 그는 풍자만화잡지 '매드'(MAD)에서 일하다가 1958년 저항문화 잡지 "더 리얼리스트"(The Realist )를 창간했고 1980년대까지 부정기간행물로 출간을 이어왔다.

플레이보이지 인터뷰어 등으로 수준 높고 해학에 넘치는 인터뷰기사를 써온 그는 외설과 성적 농담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연설가로 자주 투옥되어 유명해진 레니 브루스를 멘토로 삼았다.

이피족의 마지막 생존자로 그는 2009년까지도 집필과 강연을 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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