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8각 종탑·아치형 창문…근대 건축의 백미

입력 2019.07.16. 17:08 수정 2019.07.16. 17:08 댓글 0개
‘통한의 역사’ 지역 근대유산을 세계문화자원으로
3. 함평 옛 함평성당
지난 1952년 건립돼 70년 넘는 세월 오롯이 간직
지난 2004년 12월 등록문화재 제 117호로 지정
고딕양식 바탕 스테인드글라스 창 등 경건함 제공
문화재 유지 보수 관리 위한 실질적 지원 이뤄져야

개화기부터 6·25전쟁 전후까지 근대의 역사·문화·예술·사회·종교 등 각 분야의 의미와 가치를 품고 있는 지역의 근대문화유산.

이 중 한국의 성당은 한국 사회 변혁과 민족의 시련 속에서 지역의 역사와 함께하며 애국계몽운동 뿐만 아니라 근대식 교육, 국내 근대 서양식건축 등에 영향을 준 문화유산으로 손꼽힌다. 특히 한국에 지어진 서양식 성당 대부분은 고딕 건축 양식을 충실히 적용해 세워진 건물로 국내 성당은 물론 병원, 학교, 관청건물 등 한국 건축사에 남다른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 5월 16일부터 이틀간의 일정으로 찾은 함평 옛 함평성당 역시 함평지역 초기 천주교 전파와 역사를 같이하는 건축물로, 근대문화유산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는 지역을 대표하는 근대문화자원으로 남다른 가치를 지닌다.

◆현대 성당 건축 시초

함평군청 앞 광로에서 벗어난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함평 옛 함평성당.

붉은 벽돌의 외형을 지닌 옛 함평성당은 오랜 세월의 흔적과 함께 고즈넉한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한데 느끼기에 충분했다.

지난 1952년 건립된 옛 함평성당은 70여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원형 모습 그대로 보존돼 남다른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옛 함평성당은 고딕양식을 따르면서도 실용성을 가미해 1층은 성당 부속건물의 형태를 띤 2층 복합건물이다. 둥근 모양의 아치형 창문은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보다 눈에 띄는 것은 지상 2층 상부에 마련된 첨탑이다. 이 첨탑은 일반 고딕건축양식의 성당에서는 볼 수 없는 팔각형 형태로 지어져 구조의 독특함과 함께 건축사적으로 남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벽돌 길이도 19㎝의 길이로 온전하게 보존돼 있다. 또 고딕양식의 성당 내부에서 느낄 수 있는 높고 가냘픈 기둥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넓은 창은 성당 특유의 신비롭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은 지난 2004년 12월말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 117호로 지정됐다. 최근 도로가 확장되면서 출입구가 철거됐지만, 옛 함평성당은 근대에서 현대로 옮겨가는 성당 건축 흐름의 변곡점에 건축된 건축물로 현대 성당 건축의 시초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남다른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 직전에 지어져 전쟁 중 방화로 소실됐다가 다시 전쟁중 복구돼 함평지역 초기 천주교 전파와 역사를 같이하는 건축물로 지역사적 의의를 함께 지니고 있다. 단순히 교회 문화유산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인류 보편의 자산이 될 수 있는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 등 아픈 역사 간직

함평 옛 함평성당은 한국전쟁의 아픔 등을 온전히 간직한 근대문화유산이다.

옛 함평성당은 광주대교구 소속 본당으로, 지난 1945년 12월 나주 본당에서 분리·설정됐다.

하지만 옛 함평성당에 대한 얽힌 이야기는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살펴볼 수 있었다. 나주 노안 본당의 5대 주임신부인 박재수 요한 신부는 지난 1930년 이계윤(바로오)과 최말녀(마르타) 부부가 목포에서 함평으로 이주해오자 이들을 위해 함평의 기산 회관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또 함평읍 내교리에 사는 조 마리오 집에서 가끔씩 주일 미사를 봉헌하다 1936년부터는 나주 본당의 헨리 신부와 김재석 요셉 신부가 번갈아 와서 미사를 봉헌했다. 1940년부터는 신자들이 나주 본당이나 인근 공소의 미사에 참여했다.

이후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에 있던 외국인 신부들이 일제에 의해 감금 되거나 추방 당하자 나주 본당의 김재석 신부는 함평을 포함해 목포와 영광 등지를 관리하게 됐다.

지난 1945년 8·15 해방 이후에는 함평 성당 신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그리고 4년 뒤인 1949년 여름, 본격적인 신축공사가 벌어졌다. 1년여의 시간이 지난 1950년 5월 옛 함평성당은 상량식을 갖고 6월 하순께 완공됐다. 또 같은해 7월 23일에는 첫 미사를 봉헌했다. 당시 신자수만 800여명에 달했다. 이후 옛 함평성당은 8월 15일 광복절 등을 기념해 신축성당 축성식을 벌이려고 했지만 6·25전쟁이 터지며 축성식을 거행할 수 없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또 같은해 7월말께 미사 중 성당에 공산군이 침입해 30여명의 신자들을 연행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중 10명은 3개월간 구금되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 1950년 10월에는 북으로 후퇴하던 공산군이 성당에 불을 질러 전소되기도 했다.

2년이 지난 1952년 4월 함평 성당은 다시 성전 건립에 나섰고, 같은해 10월 이층 연와 건물로 된 성전을 완공할 수 있었다.

함평 옛 성당은 축성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지난 1953년 8월에는 성모유치원을 설립해 지역사회 아동정서 교육에 이바지했다. 또 1964년 5월부터 1965년 8월까지는 노동자식당을 운영해 1일 평균 700여명의 노동자와 극빈자들에게 국수를 무료로 제공하는 등 활동을 벌였다.

◆문화재 보존 실질적 지원을

옛 함평성당은 현재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지만, 유지보수 관리 등에 어려움이 겪고 있어 문화재를 보존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지원이 요구되고 있다.

옛 함평성당은 성당 건축물의 역사·문화적 의미를 확대하기 위해 내년 본당 건립 75주년을 기념한 내부제단 등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문화재보호법의 적용을 받으며 내부 복원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기료 등 유지 보수비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김관수 주임신부는 “함평 옛 함평성당은 고딕건축 양식과 함께 일반 성당에서는 볼 수 없는 팔각형의 첨탑형태를 지닌 근대문화유산으로 남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내년 본당 건립 75주년을 맞아 옛 함평성당의 문화역사적 가치를 다시한번 드높이고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자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를 다양하게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옥경기자 okkim@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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