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칼럼> 김광석 거리, 근대골목의 전언

입력 2019.06.10. 16:48 수정 2019.06.10. 16:48 댓글 0개
조덕진의 무등칼럼 무등일보 주필

김광석이 태어나 유년을 보냈다는 그 거리를 찾았다.

주말 오전 이른 아침 시간인데도 거리는 관광객으로 넘쳐났다. 가게들이 문 열 채비를 하는 이른 시간이지만 학생들, 가족나들이에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북적인다.

이른 시간부터 북적이는 관광객이라. 광주에서 보기 힘든 풍경에 아득한 부러움이, 질문이 밀려든다. 이 거리의 무엇이 대중의 발길을 붙잡는가. 무엇을 찾아 오는 걸까.

300여미터의 짧은 김광석 거리는 김광석의 고독을 느낄 여력은 없다. 벽화와 동상, 작은 버스킹 무대 등 대구예술가들이 뮤지션을 살려냈지만 카페, 각종 기념품 가게들. 특별할 것이라곤 별반 없어 보인다. 길 초입 벽화에 거리조성에 참여한 작가들을 표기해놓은 점은 좀 신선하다면 신선할까. 그럼에도 관광객이 넘쳐난다.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 김민기 음반에 참여하며 대중음악계에 이름을 알린 후 ‘서른 즈음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등 애절한 노랫말과 선율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던 김광석. 어느날 홀연히 세상을 등지며 대중의 맘을 아리게 했다. 그를 애석히 여긴 대중들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쓸쓸함, 고뇌, 아픈 사랑, 세상에 대한 회환, 한 뮤지션의 목숨을 건 고뇌. 그 길에서 그의 그림자라도 만나볼 수 있을까.

대구 중구가 자랑해 마지 않는 근대골목도 찾았다.

과거 일제 강점기 식산은행 건물을 박물관으로 만든 근대박물관을 보고 가슴저민 회환을 되짚어야했다. 대구시는 일제 강점기 수탈의 흔적도 자산으로 만들어 관광자원화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땠나. 몇 년전 민간에 팔아넘긴 금남로 옛 조흥은행 건물. 일제강점기 광주민족자본이 만든 최초의 은행이다. 당시 동구청 담당과장의 ‘법적으로 문제 없다’던 끔찍한 무사유에 억장이 무너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부산시는 60년대 지어진 건축물로 문화재로 지정해 시가 매입해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데 광주시민들은 그동안 뭘했지 싶어서다.

선교사들이 터를 잡아 대중진료를 했던 제중원과 선교사 사택의 역사와 아름드리 나무, 고색 창연함이 그윽하다. 특히 제중원의 옛터와 선교사 사택은 계명대 소유지만 사실상 공유지로 개방이 돼 있다. 광주는 어떤가.

우일선 선교사 사택 등 광주 선교사 사택은 광주시가 300억원 이상을 투입해 조성한 양림역사마을의 일부지만 공공성이 거의 없다. 광주신학대학이 재산권을 행사하고 있어 접근이 쉽지 않다. 과거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에 감놔라배놔라할 정도였으니. 생각해볼 대목이다. 시의 문화관광정책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이다.

재미있는 현상은 양림동 관광이 시가 300억원을 투입한 신학대 인근 양림역사마을이 아니라 양림동 주민들이 만든 ‘펭귄마을’이라는 사실이다. 양림동을 찾는 대부분 관광객이 펭귄마을을 찾았다 인근 역사마을을 둘러보는 식이다.

북구가 김정호 거리를 만든다고 한다. 특정 기획사나 개인이 주도하던 과거 방식에서 벗어나 협업과 공동창작 등을 도입해볼만하다. 다양한 스토리발굴과 여기에 광주시, 시민사회의 다양함이 더해지면 좋겠다. 하여 시간이 흘러도 사람의 마음을 발길을 부여잡는 그런 길, 그런 공간을 만나면 좋겠다.

조덕진 아트플러스 편집장 겸 문화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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