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늘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입력 2019.06.05. 18:29 수정 2019.06.05. 18:29 댓글 0개
망백(望百)을 훌쩍 넘긴 윤공희(95) 대주교가 지난 4일 본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80년 당시를 소회하며 5·18 가짜뉴스와 5·18의 왜곡·폄훼에 대한 안타까움 들어내고 있다. 오세옥기자 dkoso@srb.co.kr

올해 95세인 윤공희 대주교는 5·18 당시에는 상황을 평화적으로 수습하려 노력했고, 이후에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발로 뛰는 등 1980년 이후 인생의 절반에 가까운 40여년 동안 5·18 문제 해결에 집중하면서 광주의 어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윤 대주교는 “5·18 현장에서 계엄군에세 폭행당하는 청년을 구하지 못한 것, 진상규명과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기 위한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준비해 두고도 직전에 철회한 것이 후회스럽다”며 “아직도 그 당시 왜 ‘착한 사마리안’처럼 나서지 못했나 하는 죄책감이 있다”고 고백했다.

나주 광주가톨릭대학교 주교관에 머물고 있는 윤 대주교는 아침·저녁으로 30여분 씩 대학교를 산책할 뿐 하루 대부분을 주교관에서 기도와 독서를 하면서 보내고 있다.

지난 2011년 심장 판막 수술을 받으면서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문도 퍼졌지만 지난 4일 만난 윤 대주교는 한 시간을 훌쩍 넘긴 인터뷰에도 또렷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윤 대주교는 “심장 수술 후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있고, 3달에 한번 소화기내과 가는 것과 심장 수술 후 나타난 우울증 치료를 위한 병원 방문을 제외하면 대부분 주교관에서 보낸다”며 “사제 서품 즈음에 나타난 불면증으로만 고생할 뿐 다른 병이 없어 다행이다”며 웃어 보였다. 윤 대주교는 “90이 넘는 나이 때문에 치매가 왔나 걱정돼 검사했는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진단도 받았다”고 덧붙였다.

윤 대주교의 광주와의 인연은 1973년 주교로 승품된 후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됐다. 광주대교구장으로 활동하면서 5·18 등 사회 정의를 앞장서는 데 버팀목이 되곤 했다.

대부분 40대나 50대에 대주교 서품을 받지만 윤 대주교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대주교 서품을 받아 우리나라에서 대주교 서품 50주년을 넘긴 3번째 대주교가 될 수 있었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혈압이 올라 흥분해 건강이 걱정된다’는 말 때문에 조심스럽게 질문했지만 “이제는 괜찮다”며 1980년 5월 10일간의 일을 날짜별로 또렷히 기억하며 세세히 설명하듯 이야기했다.

윤 대주교는 “1980년 5월은 민주화 바람이 강했던 시기다. 5월초부터 전국적으로 대학생 데모가 많았고 광주도 매일 데모했었다. 16일 데모도 학생들이 모인 주변을 경찰이 가드해줄 정도로 평화로웠다”며 “17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야간통행금지를 하게 되면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고 설명했다.

윤 대주교는 “5·18을 광주 카톨릭센터(현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서 목격했다”며 “계엄군이 젊은 직장인으로 보이는 청년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해 피를 흘리는데도 선뜻 도와주러 가지 못해 늘 미안한 마음이다”고 말했다.

윤 대주교는 5월19일 서울로 올라가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자신이 목격한 5·18의 끔찍함을 설명하자 김 추기경이 전두환씨와 교황대사를 면담한 자리에서 광주에서 일어난 유혈사태를 수습해줄 것을 요구했다.

윤 대주교도 광주로 내려와 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 윤흥정 중장과 후임인 소준열 중장에게 사태의 원만한 수습을 요구했다. 윤 대주교는 광주와 외부가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에서 광주 미국문화원장을 통해 미국대사에게 광주의 상황을 전하며 수습에 노력했다.

윤 대주교는 “김 추기경이 편지와 함께 부상자 치료를 위한 돈도 보냈지만 광주가 단절된 상황이어서 받을 방법이 없었다”며 “서울지역 군종 신부가 상무대까지 내려왔고, 상무대 군종신부가 화정동까지 나와 추기경의 편지와 돈을 건네줘 받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김 추기경이 보낸 금액은 당시로는 많은 금액인 1천만원이었다. 이 돈으로 사망자 가족에게 10만원, 부상자에게는 5만원씩 위로금을 지원할 수 있었다.

윤 대주교는 “당시 군부에 의해 폭도로 몰린 광주시민들은 믿고 의지할 곳이 없는 상황이었고 광주의 사제들이 진실 규명을 촉구하며 자료와 유인물을 돌렸다”며 “이 때문에 조철현·김성용 신부 등 8명이 내란선동이라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윤 대주교는 5·18 이후 사제들과 함께 진실 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고, 5·18때문에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사면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윤 대주교는 5·18이 끝난 뒤에도 전두환을 두 번 만났다. 첫 번째는 국보위 상임위원장일 때, 두 번째는 대통령이 된 후였다.

윤 대주교는 1981년 4월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나 ‘5·18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잡힌 사람들은 사면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전 두환은 ‘경찰을 죽인 사람들을 어떻게 사면하느냐’며 거절했다. 이에 다시 ‘극형만은 없었으면 한다’고 요구하자 ‘대주교님이 대통령이라 해도 그렇게는 안될 것’이라고 다시 거절했다고 기억했다.

윤 대주교는 “전씨가 두번이나 거절하자 크게 실망했지만 이후 다행히 사형을 선고받은 3명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고 말했다.

1984년는 윤 대주교에게 잊을 수 없는 해다. 1984년 5월 요한 바오로2세가 방한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아픔의 땅’ 광주였다.

윤 대주교는 “교황께서 광주시민이 겪은 시련을 언급하셨고 ‘용서’를 주제로 말씀을 하셨다”며 “큰 시련과 아픔을 가진 광주시민에게 용서가 힘들 수 있지만, 하느님이 용서해주신 것처럼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에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고 기억했다.

윤 대주교는 “우리가 5·18의 희생을 기억해야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힘 없는 자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다”며 “힘 없는 시민을 총칼로 제압해 권력을 차지할 수 있다는 정권의 폭력 속에서도 비장하게 피어난 생명과 상생의 가치를 기억하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기쁨과 평화를 살기 위해서다”고 강조했다.

윤 대주교는 “광주는 특별한 경험과 역사를 가진 곳”이라며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키우는데 광주시민의 역할이 컸다. 광주시민은 앞으로도 인간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주교는 이어 “광주민중항쟁은 민족의 큰 시련이었지만, 인권 존중에 대한 좋은 교훈을 얻었다”며 “그 교훈을 잘 살려 모든 국민이 골고루 잘 살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선정태기자 wordflow@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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