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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과 제주 4·3항쟁, 권행백 '아버지의 우상'

입력 2019.05.27. 16:56 댓글 0개

【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알베르토가 열쇠도 꽂지 않고 현관문을 잡아당겼다. 곧 거실이었다. 신발을 신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객을 맞이했다. 낡은 식탁과 의자, 모서리의 필름지가 벗겨진 싸구려 장식장, 싱크대 등으로 작은 거실이 더욱 좁아보였다. 우리가 뻘쭘하게 서있자 알베르토가 때 낀 천 소파 위에서 담요와 베개를 치우며 앉을 것을 권했다. 그때 아래쪽 귀퉁이가 덜렁거리는 방문이 열렸다. 자세히 보니 거실 안쪽으로 방 두 개가 딸린 집이었다. 하얗게 센 머리를 아무렇게나 흩뜨린 가무잡잡한 노파가 나와서 눈인사를 했다."

권행백 소설집 '아버지의 우상'은 날것 그대로의 삶을 파고들었다.

표제작을 비롯해 '사망진단서' '잭팟' '모래 욕조' '오동의 꿈' 등 8편이 담겼다. 역사적 비극과 부딪쳐 깨어져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인의 실존 차원을 넘어 역사와 집단으로 확장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물에 대한 탐색이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체득한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우상'은 쿠바혁명과 제주 4·3항쟁을 겹쳐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문민정부 시절 학생운동의 주역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한다. 시위에 가담하지 말라던 아버지의 당부를 외면하고, 취조 과정에서 동료들의 이름을 발설한 배신행위 때문에 부자의 연을 끊는다. 복역 후 보수당 국회의원 비서로 살아가고 아버지와 10년간 불화한다. 어머니의 사망을 계기로 가까스로 아버지와 화해한다. 아버지와 함께 쿠바 여행을 떠난다. 아버지는 4·3항쟁 당시 제주 중산간 마을에서 여덟 살에 겪어야 한 가족사를 꺼내 놓는다.

"베레모를 기리는 기념관은 무료입장이었다. 전시물은 기대를 뛰어넘었다. 사진들도 다양한 데다 설명도 만족스러웠다. 1958년 그가 게릴라전에서 승리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었다. 조그만 사진 하나가 아버지의 눈을 붙들었다. 산간 마을에 들어온 일단의 무장병력이 민간인을 죽이는 장면, 그 아래 설명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소탕 작전에 투입된 정부군에게 학살당했다. 게릴라에게 음식을 제공했다는 이유였다. 더듬더듬 한국어로 해설을 붙여드렸다. 아버지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머쓱해진 내가 손바닥을 뻗어 더 둘러보기를 권했으나 아버지는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의 무게로 누른 시소의 끝은 그 반대쪽을 높이 들어 올리는 법. 우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 그 끝에 널뛰듯 올라앉았다. 그녀는 쥐어짜듯 몸을 꼬며 사선을 넘고 있었다. 오빠 나를 데려가. 나도 이대로 죽고 싶어. 절규였다. 그녀가 몸을 활처럼 뒤로 휘더니 이윽고 긴 신음을 토해냈다. 지그시 감은 두 눈에서 물기가 방울져 내렸다. 나 느꼈어. 드디어. 그녀의 수줍은 미소가 눈물에 섞여 볼우물 안으로 흘러들었다. 방안에는 죽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삶을 마무리한 자가 안락하게 누워 있었다. 나는 사망진단서를 작성했다." 280쪽, 1만2800원, 아마존의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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