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민족상잔의 아픔을 간직한 다리

입력 2019.05.24. 14:45 댓글 0개
[광주스토리100]산동교

"이대로 싸우다간 다 죽는다. 여기서 병력을 철수시키도록!"

"안됩니다. 여기서 포기하면, 광주를 내주게 됩니다."

"인민군은 3천명이다. 그런데 어떻게 막을 수가 있단 말이냐."

"총이 없으면 물어뜯어서라도 막아야죠. 우리가 버터야만 광주시민들이 살 수 있습니다."

1950년 새벽, 광주 산동교에서는 병사들을 퇴각시켜야한다는 대장과 포기하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부대장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북한군들이 밀려오는데 군대가 없어 인근 중학생까지 동원한 병력으로 버텨야하는 상황이었다. 엄청난 희생이 불가피한 비극의 현장이었다. 

이들 부대가 있던 곳은 1934년에 건설된 옛 산동교. 길이 228m에 달하는 이 다리는 광주에서 장성을 잇는 국도 1호선의 일부였다. 물자 수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철근 콘크리트교로 건설된 옛 산동교는 6․25 전쟁 전까지만 해도 광주의 관문 역할을 톡톡해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산동교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것도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민족상잔의 전쟁이었다. 산동교는 같은 핏줄끼리 총을 쏘아대는 비극의 한복판에 있었고, 그 아픔을 고스란히 목도했다. 1950년 7월 23일 새벽 4시였다. 

산동교-옛 산동교는 1950년 7월 23일 군경합동부대가 북한군의 광주 점령을 막기 위해 폭파했던 광주 지역 유일의 6.25 적전지이다.

1950년 7월 23일, 산동교에 울린 포성

1950년 7월, 광주 5사단은 임진강을 건너오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경기도 파주 봉일천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군 6사단은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었다. 7월 8일 광주에 전남관구사령부가 급하게 설치됐다. 

봉일천 전투에서 붕괴된 5사단을 대체할 새로운 5사단을 편성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전투를 치를 만한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광주 시내와 인근 지역의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병사 1천여 명을 동원해 1개 연대를 꾸렸다. 물론 전투를 치를 수 있는 훈련된 병력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쥐어진 무기는 일본군이 두고 간 99식 소총과 당시 제 3육군병원에 입원 중인 부상병들에게서 회수한 M1소총이 전부였다. 그것도 전체 병력의 10분지 1만이 무기를 지녔다고 하니 얼마나 열악한 상황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 상태에서 북한군은 7월 19일과 20일, 전주를 함락시킨다. 북한군이 장성 갈재를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7월 22일 전남관구사령부는 여수와 목포에 보관 중이던 정부미를 반출하고 전남방직에 있던 광목을 실어 여수로 옮긴다. 북한군의 진격을 기정사실화한 준비였다. 

그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북구 연제동과 광산구 산월동 사이의 산동교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영산강이 광주 시내를 휘감고 도는 이 지역에 새로 편성된 5사단 예하 26연대 공병들이 투입됐다. 진입로가 되는 산동교 중간을 폭파해 적의 진입을 차단하려고 한 것이다. 다리 동쪽의 능선에는 군경이 배치됐다. 

7월 23일 오전 11시 30분, 북한군 제 6사단은 탱크 3대를 앞세우고 산동교에 이른다. 군경 합동부대는 2.3인치 로켓포를 발사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탱크는 꿈쩍도 안했다. 1시간 동안 공방전을 벌였지만 정규군인 인민군의 화력을 이겨낼 수 없었다. 산동교 전투에서 김홍희 총경이 전사하고, 장명규 경감은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산동교 전투 이전에 비극은 시작됐다 

산동교 전투의 비극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일어났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과거 좌익 활동 경력자들인 보도연맹원 상당수가 광주형무소에 구금돼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군이 이 지역으로 진입해오자 보도연맹원 일부가 학살된 것이다. 북한군이 들어오면 이들이 협조할 것을 염려해서였다. 

7월 20일과 21일 경에는 산동교 근처에서도 처형이 일어났다. 일명 불갱이고개라 불리는 산동교 동쪽 고갯길에서 보도연맹원들의 학살이 이뤄졌다. 학살된 이들 중에는 일제 때 변호사였고 해방 후 전남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이덕우 등 항일투사들이 포함돼 있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펴낸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군 진입에 따른 공포감과 부역을 할지 모른다는 의구심만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이후 산동교 앞에는 새로운 다리가 건설됐다. 하지만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옛 산동교는 그대로 남아 새로운 산동교와 나란히 영산강 물결 위에 서있다. 어두운 시대, 아픈 역사를 증언하듯 흐르는 강 위에 선 옛 산동교, 그래도 세상은 돌아가고 시대는 흘러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한 새 산동교. 분단된 나라의 비극, 그 굴곡진 역사를 생각하는 이들에게 무거운 숙제를 던져준다. 엣 산동교는 광주에서 유일한 6․25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전쟁의 아픈 역사를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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