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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여행,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 길 가다

입력 2019.05.09. 14:05 댓글 0개

벌교라는 지명 속에는 ‘쫀득쫀득하다’는 단어가 숨어 있는 느낌입니다. 

제사상에 빼놓지 않고 올라갔던 참꼬막의 맛을 기억하듯이 저에게 기억되는 벌교는 쫀득쫀득한 식감으로 기억되었습니다.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을 읽고 언젠가는 꼭 벌교에 가서 소설 속에 나오는 진득거리는 갯벌과 철 다리, 중도 방죽을 꼭 보고 말리라 하는 생각을 품기도 했었습니다. 

그랬기에 전라도로 여행 가자는 말에 망설임 없이 ‘벌교 가자’가 되었습니다. 

소설 태백산맥 속의 배경이 되었던 벌교로 문학기행을 떠나 보겠습니다. 

▲보성여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 중심거리로 소위 본정통이라고 불렸던 길에 남아 있는 판자벽에 함석지붕의 전형적인 일본식으로 지어진 2층 건물은 남도여관,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시절에도 이 건물은 여관이었고 그때의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었습니다. 

이 건물은 2004년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제132호)으로 지정되어 2012년 6월 7일 중건 개관되었답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숙박업소 등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소설 속 명칭인 남도여관은 당시에는 5성급 호텔을 방불케 할 정도의 규모로 소설에서는 임만수와 그 대원들이 한동안 숙소로 사용했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잠을 자고 여관 밥을 먹어?" -태백산맥 3권 85쪽-

▲벌교 금융조합

조용조용한 거리를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 봅니다. 

하얀 건물의 이름은 ‘벌교 금융조합’. 일제강점기 벌교는 상업적 교류가 활발하여 꽤 번창한 곳으로 당대 가장 번화가인 삼거리 첫머리에 벌교 금융조합이 자리 잡고 있었답니다. 

붉은 벽돌을 바탕으로 그 사이에 돌을 깎아 넣어 견고함을 더하였으며 좌우 대칭의 균형 잡힌 양식은 당대의 대표적인 관공서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후에 지역민들의 농민상담소 등으로 건물 용도가 변하고 약 80여 년 동안 방치되었던 공간을 복원공사를 통해 과거 금융시설로서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도록 했답니다. 

벌교 금융조합 내부는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화폐 시대를 도입한 조선시대 조선통보, 한국 최초의 화폐, 고려 시대 고려전 등 세계화폐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1910년대 금융기관으로 사용되어 오던 때부터 고객들과 직원들의 경계를 지어준 단단한 대리석 테이블은 지금은 소설 태백산맥을 필사하는 테이블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필사하고 간 사람의 뒤를 이어 다음 부분을 필사하는 릴레이 방식입니다. 저도 편하게 자리 잡고 오랜만에 원고지에 글씨를 써 보았습니다.

‘금융조합이라는 것이 결국은 돈 장사이고 보면 그의 이재 솜씨는 멋 부리는 거보다 한 수가 더 앞질러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금융조합장 송기묵은 탄탄한 재력가이기는 하나 은밀히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다루며 딸을 서울의 이화여대에까지 유학시키지만 결국 좌익들에게 죽고 마는 비극적 인물입니다. 

그와 깊은 관련이 있는 금융조합을 한 바퀴 돌아보며 소설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뒤편으로는 당시 사용되었던 금고와 직원 전용 출입문 등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 과거의 역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소화다리(부용교)

큰길로 내려와 벌교천을 따라 소화다리(부용교)로 향했습니다. 

소화다리는 일제 수탈의 비극을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다리의 쇠 난간까지 뜯어 가버려서 난간 없는 다리는 민초들이 처형당하는 장소가 되어 버렸답니다. 

다리가 건립될 당시가 1931년 소화. 

일본 국왕 6년이었다 하여 누가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소화다리로 불렸던 것이 지금도 대부분 소화다리라 부릅니다. 

이 낡은 다리는 소설 태백산맥에서 묘사하는 대로 우리 민족의 비극과 상처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습니다. 

▲홍교

벌교 천을 따라 더 내려가니 소설 속 주요 인물인 염상진과 하대치 등이 지주에게 뺏은 쌀을 이 다리 위에 쌓아 놓고 소작농에게 나눠 줬다는 홍교가 나옵니다. 

보물 제304호로 지정된 홍교는 세 칸만 원래 다리고 나머지는 새로 복원한 것이랍니다. 

벌교(뗏목다리)라는 지명은 이 다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 이 자리에는 뗏목으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고 해요. 

선암사의 승선교를 모방했다는데 다리 아래 용머리가 특이합니다. 

용머리는 가까이 가서 보면 용처럼 보이지 않은데 적당히 떨어져서 보니 눈이 부리부리한 용머리입니다. 

소설 태백산맥의 김범우처럼 홍교 다리 위에 서서 멀리 보이는 태백산맥의 끝자락을 눈에 담아 봅니다.

"김범우는 홍교를 건너다가 중간쯤에서 멈추어 섰다..... 그러니까 낙안벌을 보듬듯이 하고 있는 징광산이나 금산은 태백산맥이란 거대한 남무의 맨 끝가지에 붙어 있는 하나씩의 잎사귀인 셈이었다." -태백산맥 1권 256쪽-

▲채동선생가

민족음악가 채동선 선생 생가가 있다 해서 일부러 찾아간 곳입니다. 

벌교에서 태어나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던 선생은 1919년 3.1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일본의 감시를 피해 일본 유학을 했습니다. 

1932년 가곡 <고향>을 발표하기도 하고 일본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서울 근교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민족음악을 채보하는 데 힘썼습니다. 

1953년 부산 피난 생활 중에 신병을 얻어 53의 일기로 타계하였습니다. 조국, 독립축전곡, 개천절, 한글날, 3.1절 노래, 진도아리랑, 도라지 타령 등 수많은 곡을 썼습니다.

채동선 선생의 생가 뒷산인 부용산 올라가는 길에는 소설 태백산맥에서 청년단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부용산 오리길’이라는 테마로 만들어진 길이 산책하기 좋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김범우의 집

벌교 제석산 아래 ‘봉림’마을로 들어가 운치 있는 흙담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김범우의 집으로 등장하던 집을 만날 수 있습니다.

벌교의 유지인 김사용 어른의 풍모가 그대로 드러나는 집의 모습이 대지주 소유의 집다웠습니다. 

원래도 대지주였던 김 씨 집안의 소유의 집이었다는데 안채와 아래채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보수공사를 하기 위해서인지 가재도구 등이 어지럽혀 있어서 어수선했습니다. 

흙담길을 둘러보면서 규모가 무척 컸던 집임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 소화의 집과 현부자네 집

태백산맥 문학관과 마주한 소화의 집과 현 부자네집은 소설 속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 같았습니다.

특히, 한옥과 일본 주택 양식이 섞인 현부자네 집 2층 누각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유리로 창문을 만들려면  많은 비용이 들었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싣고 왔다고 합니다.

소설 속에서 현부자는 누각에 올라 본인 소유의 중도 들판을 내려다보며 소작농을 감시하고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벌교 시내는 그리 크지 않지만 천천히 걸어서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곳을 찾아가 보니 많이 걷는 여행이 되었습니다. 

시골길의 한적함이 주는 걷는 즐거움이 여행의 맛을 살려주었습니다. 

벌교여행은 망설임 없이 태백산맥 문학기행 길 코스로 정해 다녀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오랜 건축물에 담겨 있어 기록만이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태백산맥 문학기행으로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의미 깊은 여행이었습니다. 

※ 본 게시글은 전라남도 SNS 관광 기자단 이난희 기자님이 작성하신 글입니다. 

[출처] [기고] 벌교여행,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 길 가다|작성자 남도여행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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