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김봉준 화백의 ‘신성한 미래 5월’ 광주 헌정전

입력 2019.05.07. 18:38 수정 2019.05.07. 18:38 댓글 0개
도도한 서사, 염원과 바람의 한 판 ‘붓 굿’
김봉준 화백의 ‘신성한 미래 5월’ 광주 헌정전
‘오래된 신화’
미래여는 신성으로 5월 재해석
‘백년의 울음통’
국가희생자 원혼 달래는 제의
오프닝 오늘 저녁 7시 메이홀
18일 민주광장 붓굿 퍼포먼스
19일 메이홀 작가와의 대화
서울 태생으로 서양미술을 전공하고 탈춤 등 전통문화에 매료돼 신화를 공부하러 강원도로 유학을 떠난 1세대 민중미술가 김봉준 화백이 생애 첫 광주 헌정전을 메이홀에서 갖는다. 작품 앞에서 선 김봉준 화백. 메이홀 제공

“이번 전시를 한 판의 흐드러진 ‘굿’판으로 이해해주시면 좋을 듯 합니다.”

복합문화공간 메이홀이 5월 민중항쟁 39주년 기념전으로 마련한 ‘오월의 붓 굿’을 선보이는 김봉준(65·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 화백의 설명은 간단하다.

이번 전시는 김봉준 화백이 전생애를 담아 역사적, 문화적, 신화적으로 해석한 1980년의 의미와 무게, 미래를 염원하는 자리다. 대형 걸개그림과 영상, 퍼포먼스, 대담 등 종합예술이 그림(붓)을 매개로 관람객과 함께 ‘맺힌 것은 풀고, 미래는 꿈꾸는’ 한판 굿 판이라는 설명이다.

김 화백은 “굿은 본디 전통적으로 소통의 방식이고 치유의 의례이자 신앙이고, 민중의 모임이면서 민중들의 문화이고 또 달리는 투쟁의 양식인데 서구문명이 들어오면서 터부시되고 저급문화로 전락했다”며 안타까움을 표한다.

이같은 행태는 광주민중항쟁을 비롯한 민중 운동을 단순히 정치적 사안으로 협소하게 해석하는 우를 범한다는 지적이다. 이는 문화적 상상력이나 문화다원주의, 탈근대를 부정하는 위험한 짓 이라는 말한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신화적 문화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이제 도도한 정신세계사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정신과 혼을 찾아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김화백은 “미래를 여는 ‘재신화화 시대’의 관점에서 광주항쟁을 기점으로 한 한국사회 민주화운동은 ‘신성한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신화학은 서구 학자들도 ‘마지막 인문학’이라 할 정도로 미래학문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굳이 부연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서 평화운동과 세월호,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국가폭력과 새 희망의 역사를 써낸 근 현대사를 신화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대형걸개그림(9m×1.20m) ‘신화의 나라 ’두 점과 역시 1980 광주민중항쟁 이후 근현대사에서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의 원(寃)을 달래는 제의(祭儀)의 그림 ‘백년의 울음통’(2.50m×1.20m)을 야심차게 선보인다. 물론 모두 광주를 위해 그린 신작이다.

메이홀 전시장엔 리반의 음악과 황현성이 영상을 입힌 ‘김봉준의 오월 울음통’이라는 특별 영상이 매일 상영된다. 김봉준의 오월을 바라보는 눈길의 총망라다.

‘오월의 붓 굿’은 8일 저녁 7시 오프닝을 시작으로 18일 오후 5시 민주광장에서 민주광장에서 붓굿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이어 19일 오후 4시 메이홀에서 김봉준 임종영 이상호 주홍이 펼치는 작가와의 대화가 진행된다.

이번 전시는 그에게 각별하다.‘1980년 광주민중항쟁은 한명의 예술가로 올곧은 문화정신을 끝까지 견지하게 해준, 다른 곁가지로 빠지지 않고 민중과 함께 오게한 정신의 요체’라며 “항쟁의 도시 광주에서 제 예술을 말할 수 있어 영광되고 감사하다”는 김 화백의 설명은 의례가 아니다.

생애 첫 광주 개인전을, 그것도 5월 민중항쟁 기간 특별전 이라니. 그의 설렘은 과장이 아니다. “마치 고향에 온 것 같다”는 설렘에는 그의 전 생의 개인사가 어려있다.

1970년대 미술로 대한민국 최고를 자랑하던 홍익대에서 미술을 공부한 김 화백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1급 수배자가 됐다. 창작과 비평사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시절 광주항쟁을 접하고 서울지역 탈반 연합회와 함께 광주진실을 알리는 전단지를 만든 것이 발각돼 도망자 생활을 시작했다. 화가라는 제1직업 외에 시민운동과 농민운동, 노동운동, 평화운동, 생태운동 등 시민운동가로 살아왔다.

단순히 수배와 도망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기 보다 수배의 길에 들어선 그의 선택이 이미 삶은 방향을 암시했고 그 중심에 1980년 광주가 있다는 설명이다.

홍대 미대 에서 조각을 공부하던 그는 탈춤에 심취했고 민중미술운동의 큰 축 ‘두렁’을 창립했다. 1990년대엔 생태주의 문화에 눈뜨고, 사고는 신화로 확대됐다. 현대미술 전공자들이 서구로 유학을 떠나던 시절 그는 강원도 산골 로 내려가 신화미술관(오랜미래신화박물관)을 열어 서울과 강원도 문막을 오가고 있다. 조덕진기자 mdeung@srb.co.kr

# 이건어때요?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