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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벌거벗게 만드는 사랑, 이혁진 '사랑의 이해'

입력 2019.04.25. 06:03 댓글 0개

【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서툰 왈츠를 추는 한 쌍처럼, 미경이 물러서면 상수도 물러섰다. 미경이 망설이다 다시 다가서면 상수 역시 망설이다 다시 다가섰다. 서로 다정하게 바라보면서도 주위를 맴돌고 조금씩 엇갈렸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각자의 이유로 서로 발을 밟지는 않은 채 이어지고 끊어질 듯하다가 다시 이어지는 춤을 추는 동안 시간은 흘렀고 심사 결과가 나왔다."

이혁진(39)의 장편소설 '사랑의 이해'가 나왔다.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자 데뷔작인 '누운 배'(2016)에서는 회사라는 조직의 모순·부조리를 꼬집었다.

이번 작품에서는 회사로 표상되는 계급의 형상이 인생 곳곳, 사랑의 영역까지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짚었다. 소설의 표면은 방황하는 연인들의 이야기다. 이면에 우리가 사랑할 때 말하는 것들, 이별할 때 침묵하는 것들이 담겼다.

"은행에서 일하면 돈맛을 모를 수가 없다. 얼마나 맵고 짠지, 또 달달하고 상큼한지. 창구에 앉아 있으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맡기러 온 사람과 꾸러 온 사람이 한눈에 꿰뚫려 보였다."

"망설였다. 관계를 더 발전시킬지 말지. 수영이 텔러, 계약직 창구 직원이라는 것, 정확히는 모르지만 변두리 어느 대학교를 나온 듯한 것, 다 걸렸다. 일도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그 두 가지가 상수 자신의 밑천이었기 때문에, 상수가 세상에서 지금까지 따낸 전리품이자 직장과 일상생활에서 그 위력과 차별을 나날이 실감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 작가는 "이야기를 써 나가면서 사랑이 다른 감정과 다르다면 결국 우리를 벌거벗게 만들기 때문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사랑의 징후인 두려움과 떨림도, 보상인 환희와 자유로움도 그래서 생겨나는 것 아닐까, 하고. 같은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에곤 실레의 나체화처럼 벌거벗은 우리는 대개 헐벗었고 뒤틀려 있기 마련이니까. 벌거벗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벌거벗은 상대방을 지켜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자존심, 질투심, 시기심같이 사랑을 둘러싼 감정들과 온갖 생활의 조건들은 오히려 더 갖춰 입고 뻔뻔해질 것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사랑한다면, 사랑을 원한다면 결국 거짓의 밝고 좁은 조명 아래서든, 거울처럼 자신을 비추는 짙은 어둠 안에서든 입고 껴입을수록 더 헐벗고 뒤틀리기만 하는 자신을 마주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356쪽, 1만3000원,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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