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칼럼>아! 금호아시아나

입력 2019.04.18. 18:43 수정 2019.04.18. 18:43 댓글 1개

광주사람들의 고속버스 사랑은 각별했다. 광주라는 이름을 달고 전국을 누비던 호남을 연고로 한 기업 광주고속에 대한 자부심도 마찬가지였다. 광주고속 창업주는 고 박인천 회장이다.

박인천은 가난했다. 어머니는 친정을 가는데 짚신을 아끼기 위해 150리 길을 맨발로 걸었다. 그는 20대에 백목장수, 가마니 장수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923년엔 돈을 벌겠다고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빈손으로 귀국했다. 고향에 내려온 그는 순사를 하다 보통문관 시험에 합격해 사법주임 (경위)가 됐다. 그 시절 박인천은 조선 사람에게 군림하던 여느 순사와 달리 조선인들의 사정을 들어주고 풀어주는데 적극적이었다. 그때 인연은 그가 지역에서 사업하는데 큰 밑천이 됐다.

박인천이 여객 사업에 뛰어 든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이다. 당시 광주에 인력거 70대와 소 수레와 마차 40여대가 성업 중이었으니 택시 사업은 최첨단 업종이라 할만 했다. 황금동에서 ‘포드자동차 T’형 2대로 택시사업을 시작했다. 택시비는 4㎞에 50원, 시외는 1㎞ 20원이었다. 쌀 한 가마 값이 5원이었으니 상당한 사업이었다.

1948년 광주~장성, 광주~담양 두 곳에서 버스 면허를 따내고 1968년에는 광주~서울간 고속 버스 시대를 열었다. 광주고속을 설립 한 것은 나이 50을 넘어서다. 고속 버스 사업을 하는데 교통부 공무원은 그야말로 상전이었다. 버스 한 대를 증차하려고 “교통부 과장에게 50번은 인사를 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2세 경영으로 이어지면서 사명을 금호 그룹으로 바꾸고 사세 규모도 커졌다. 1988년 아시아나 항공을 설립해 덩치를 키우더니 대우 건설과 대한 통운을 인수하며 재계 서열 7위에 올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무리한 사세 확장의 여파로 유동성 위기에 몰리면서 결국 주력 계열사인 아시아나 항공을 시장에 내놓았다.

이제는 대기업에서 중견그룹으로 사세가 줄어들 판이다. 박삼구 회장은 “피를 토하는 심정... 아시아나는 모든 것이었다”고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황제 경영의 폐해’라고 하지만 호남 사람들의 자부심이었던 기업이어서 착잡하고 아쉽다. 지하의 박인천 회장은 지금의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윤수 칼럼니스트 nys804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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