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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진선규 "꿈, 접어야한다면 잠깐 고이 접는게 맞지요"

입력 2019.04.17. 06:07 댓글 0개
뮤지컬 '나빌레라' 진선규 ©서울예술단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발레를 하는 70대 노인 '덕출'과 일심동체다.

제38회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안긴 영화 '범죄도시'의 우락부락 조선족 '위성락'도, 16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극한직업'의 닭 튀기는 '마 형사'도, 배우 진선규(42)의 본모습이 아니다.

완결이 된 포털사이트 다음의 웹툰 '나빌레라'(글 Hun·그림 지민)에서 일흔을 몇 달 앞두고 친구의 장례식장을 다녀온 뒤 자신이 오래 전부터 꿈꾼 발레를 하기로 결심하는 덕출과 비슷한 면이 많다.

조근조근한 말투와 한없이 선한 얼굴로 주변사람을 알뜰히 챙기는 덕출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기억하는 발레로 감동을 선사한다. 한국판 '빌리 엘리어트' 노인 버전이다.

진선규는 웹툰이 원작인 서울예술단의 신작 창작가무극(뮤지컬) '나빌레라'에서 덕출을 연기한다. 어릴 때 러시아의 발레 수업에서 잠깐 본 발레가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던 덕출은 어느 날 자식들 앞에서 용기를 내 말한다. "발레를 해보려고 한다"고. 몸에 착 달라붙는 흰 발레복 차림으로 나타나자 중년의 아들은 언성을 높이고 만다.

진선규는 "덕출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왔어요.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는데 무엇을 더 바라랴'는 마음이었죠. 덕출은 어릴 때 보고 기억해둔 발레를 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해왔을 것 같아요. 해왔던 습관들이 발레를 할 수 있게 하는 거죠"라고 말했다.

영화 출연과 일곱살 딸·네 살 아들의 육아로 빠듯한 일정에도 진선규는 꾸준히 무대에 올랐다. 서울 공연 기준으로 무대에 오르는 것은 연극 '신인류의 백분토론' 이후 2년 만이다. 하지만 지난해 배우들이 돌아가면서 1회씩 출연한 '낫심'에 나왔고, 자신이 속한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나와 할아버지' 지방공연도 "동료들과 여행가는 마음으로" 빠지지 않고 있다.

뮤지컬 '나빌레라' 진선규 ©서울예술단

작년 초 웹툰 '나빌레라'를 먼저 본 진선규다. 감동을 크게 받은 데다가 박해림 작가, 서재형 연출, 김효은 작곡가, 유회웅안무가가 뭉친만큼 이 작품은 대본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울면서 웹툰을 읽었는데 공연 연습을 하는 내내 제가 벅차서 눈물이 또 나는 거예요"라며 웃었다.

웹툰 속 장면처럼 흰 레오타드를 입고 공연 이미지 사진을 촬영했는데 "덕출의 마음이 느껴졌다"고 했다. "발레를 막 시작했을 때 너무 좋고 행복해하시지 않았을까요? 덕출은 발레리노처럼 중력을 거슬러 멋진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에요. 행복하게 즐기는 모습이 느껴지면 성공인 거죠. 안무가 힘들지만 잘 해내려는 마음을 녹여낸다면 성공"이라며 즐거워했다.

진선규는 대학로에서 몸을 잘 쓰는 배우로 유명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동문들이 의기투합한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첫 프로작품이자 진선규의 데뷔작인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2004년 초연 때도 애니메이션 '타잔'에서 영감을 받은 '야생소년'의 몸 동작으로 호평을 들었다. 연극 '뜨거운 여름'에서는 현대무용을 방불케 하는 유연한 춤 동작을 과시했다.

이처럼 진선규는 다재다능을 뽐내며 '천의 얼굴'을 드러낸다. "연기하는 배역의 가치관을 이해하려고 해요. 그러다보면 제 사고도 바뀌는 것 같죠."

뮤지컬 '나빌레라' 진선규 ©서울예술단

'난쟁이들' '리걸리 블론드' 등 뮤지컬에도 다수 출연했다. 뮤지컬은 노래로 정서를 무한대로 확장하는 매력이 있다고 한다. 덕출의 독백은 뮤지컬 노래로 승화된다. "많은 분들이 웹툰을 보면서 동영상을 상상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뮤지컬은 노래와 춤으로 그 상상의 정서를 확장해주죠."

봄이면 벚꽃이 만개하는 경남 진해가 진선규의 고향이다. 운동을 좋아해 사회체육학과 진학을 꿈꾸며 그곳에서 마음껏 뛰어놀던 그가 연기에 매력을 느낀 것은 고3 때다. 친구 따라 삼삼오오 모여 골방에서 연극을 하는 이들을 보고, 푹 빠져버렸다. 사람들이 모여 연극을 만드는 과정이 좋았다. "저는 가난했고 행복하지 않았는데, 거기서 따듯함을 느꼈죠"라고 돌아봤다.

두 달 동안 연기 연습을 하고 한예종 연극원에 덜컥 붙어버렸다. "그러니 연기를 얼마나 못했겠어요. '연기'의 '연'자도 몰라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연기를 너무 못하니 할 줄 아는 게 없었죠. 움직이는 것은 좋았어요. 그래서 텀블링를 하고 계속 몸 쓰는 작업을 했죠."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는 게 좋아 탄생한 극단이 공연배달서비스 간다다. 친구인 민준호 연출이 대표이고, 배우 이희준도 이곳 소속이다. 부인인 배우 박보경도 이 극단에서 활약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에게 가장 큰 힘을 주는 이들이다. 여전히 소박한 것을 좋아하는 진선규는 '1000만 배우'라는 수식이 낯설고, 감도 잡히지 않는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연극, 뮤지컬 공연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숫자잖아요."

뮤지컬 '나빌레라' 진선규©서울예술단

계속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고, 러브콜이 곳곳에서 잇따르는 배우가 됐지만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조언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상대방이 처한 환경이 어떠한지 정확히 알 수 없잖아요. 무조건 '힘을 내라'고만 이야기하는 것은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될 수 있죠."

자신의 꿈을 위해서 지금 무엇인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강요는 말이 안 되는 것이라고 본다. 꿈은 덕출처럼 잠시 접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접어야 하는 순간이라면 잠깐 고이 접는 것이 맞죠."

고이 접어놓은 시간들은 70대에 발레로 날아오르는 덕출의 상황처럼 오히려 충전의 기회가 된다. "정말 행복해할 일이라면, 잠시 접어둬도 언제가 할 상황이 찾아온다고 믿어요.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죠."

유명한 시의 구절 '고이 접어 나빌레라' 그대로다. 발레 용어 중에서는 '그랑플리에'가 가장 가깝다. 무릎을 크게 굽히는 동작. 도약과 회전을 위해 반발력을 얻거나 충격을 흡수하기 위한 것이다. 진선규가 힘껏 그랑플리에 자세를 취했다. 공연은 5월 1~12일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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