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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행진축제’를 제안함
입력 2019.04.05. 14:52 수정 2019.04.05. 15:17 댓글 0개외지인을 상대로 광주·전남 이미지 여론조사를 해보면 보통 5·18, 무등산, 맛의 고장(味鄕), 예향(藝鄕) 등이 상위권에 오르고 있다. 하지만 이 이미지에 맞게 외지인들이 직접 체험하고 기억하는 이벤트들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식어버린 ‘5·18’의 열기
한 때는 있었다. 1997년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고 민주화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매년 전국에서 수십만이 광주를 찾아 망월동 묘지(구 묘역)를 참배하고, 시위도 함께 했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때문에 당시에는 이것이 시대의식으로 작용했다. 5월 17일 전야제와 5월 18일 망월동을 출발하여 전남 도청앞까지 행진하여 온 뒤 갖는 추모제가 피크였다. 수많은 깃발이 나부끼고 수만명의 사람들이 금남로를 꽉 메워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불렀다. 그러나 국가기념일에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전야제와 추모제는 여전히 그 장소에서 열리는데 참여자는 1만명을 넘지 못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무등산도 2013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그 해 탐방객이 4백만명에 이르렀지만 이제는 많이 줄었다. 예향과 미향 때문에 일부러 광주·전남을 방문하는 관광객은 아직 별로이다.
광주에서 횃불을 올렸던 역사적 사건은 학생독립운동과 5·18민중항쟁이다. 특히 5·18은 임진왜란과 조선 말에 전국에서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던 호남의병의 척왜구국(斥倭救國)운동과 3·1운동, 11·3학생독립운동, 3·15, 4·19운동을 뿌리로 해서 일어났던 시민항쟁이자 우리나라 민주화를 견인했던 운동이다. 5·18이 남겨준 ‘광주정신’은 부당한 공권력에 대한 항거, 높은 도덕성과 공동체 의식,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학생들이 일제의 무도한 진압을 뻔히 알면서도 맨 손으로 독립을 외치고 행진에 나섰던 용기나, 계엄군의 진입이 눈앞에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막고자 나섰던 1980년 5월 26일의 ‘죽음의 행진’은 민주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가 영원히 계승해야 할 일이다. 기념일때마다 갖는 재연행사도 계승의 취지를 담고 있으나 내용이 빈약하고 규모가 작아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기념행사도 달라져야 한다. 하여 필자는 광주·전남의 역사를 한데 담은 ‘국제 행진 축제’를 제안한다. 그 정신을 전승하고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함께 참여하여 체험할 수 있는 내실있고 규모있는 행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진’의 사전적 의미가 다수의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시도하는 공개적이고 집합적인 의사표현 행위이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대열의 주제를 각각 ‘분노의 행진’‘추도의 행진’‘화합의 행진’‘미래를 향한 행진’으로 각각 나눈다. 외국의 의미있는 행진 축제도 초청하고, 여전히 어려움에 처해있는 나라를 격려하는 ‘나눔’의 이벤트도 갖는 등 다양한 행진을 준비한다면 무한한 의미를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민주화가 달성된 이후 우리는 미래의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익명의 SNS소통, 가족의 불통, 혼밥(개인주의)이 범람하고 심지어는 5·18 가짜뉴스까지 활개를 쳐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이 혼란의 시대에 ‘행진’에 대한 프로그램을 잘 짜서 국민이 함께 체험한다면 공동체 의식의 회복, 배려, 참여, 미래를 향한 비전 설정 등의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우리가 지난날 스스로 감동했던 월드컵 응원, 비폭력 촛불시위에 이어 지난 역사가 담고 있는 정신을 계승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진’으로 역사 정신 회복을
국민은 의미있는 체험과 참여를 갈망하고 있다. 항상 시대의 선봉에 서왔던 광주가 국가의 미래 방향을 담은 이벤트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 <기고>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나는 파리 19구에 산다. 서민 동네이자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난 구역이라 한국인은 거의 만나기 어렵다. 옆방 이웃은 난민 출신이다. 우리는 파리 주민이자 이방인이다. 남의 나라에서 남루하게 살아가는 처지라 생활이 풍족하지는 않다. 대신에 1980년대 한국 달동네에서 있었을 법한 일화가 가끔 일어난다. 어느 방에서 아이가 너무 울면 문을 열어 남의 아이를 안고 달래준 달지, 이 빠진 접시에 음식을 담아 맛보라고 가져다준달지….벽은 소음에 취약해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웃으로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소리로 확인한다. 옆방에서는 아프리카 노래가 자주 흘러나온다. 엄마는 아이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밝은 리듬에 콩룩콩탁 거리는 발음이 사랑스러운 노래다.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밝고 흥겹다. 때로는 이 귀여운 노래 위에 시름이 느껴질 때도 있다.낯선 리듬과 노랫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새댁의 하루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옆방에서는 나의 한국어를 꽤나 들었을 것이다. 내가 일 때문에 지방에 며칠 다녀왔을땐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며 새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 적도 있다.옆방 새댁이 어떤 경로로 파리에 오게 됐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아이를 데리고 미장원으로 출근한다는 정도만 안다.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옆방 모자를 만났다. 넓은 천을 이렇게 저렇게 꼬아 머리에 두르고 아프리카 스타일 프린트가 화려한 외투로 한껏 차려입었다. 예쁘다. 지하철 의자에 나란히 앉은 모자를 맞은편에 앉은 내가 핸드폰으로 찍는다.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칭얼대던 아기는 어느덧 엄마에게 프랑스어로 떼를 쓸 정도로 컸다.일하러 가느냐고 그녀가 내게 묻는다. 지하철 창문 쪽으로 유리 닦는 시늉을 하며 청소라고 프랑스어로 발음한다. 나는 요즘 청소 일을 한다."이브람 엄마도 일하러 가요? 미장원이 어디에 있어요?" "아뇨, 오늘 일 안 해요. 그런데... 20유로... 있어요? 20유로만 빌려줄 수 있어요?"돈 빌려달라는 말에 머릿속이 순간 복잡해진다. 20유로면 3만 원정도 된다. 지갑 속에는 꼬깃꼬깃한 5유로짜리 지폐와 동전이 들었다. 주로 카드를 사용하니 현금 가지고 다니는 일이 드물다. 잠깐 고민 후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새댁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표정에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해 미안할 지경이다."이브람 엄마, 집에 지갑 놓고 나왔어요?" "미장원 일 못한 지 한 달도 넘었어요. 체류증이 끝나서 일 못해요. 먹을 게 없어요. 파리에 친구가 없어요."난민 체류자격 기한이 끝나 미장원에서 해고된 모양이다. 프랑스에서 체류증 없이 노동하는 건 불법이다. 두 모자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엄마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연신 흔들며 아이가 떠나는 내게 인사한다. 옆방에 사는데 밖에서 만나니 새삼 반가운 모양이다. 아이의 작고 까만 손을 바라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유튜브 아카이브에서 1980년 어느 날의 '이종환의 디스크쇼' 오프닝이 들린다.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이따금 향수병에 시달릴 때 한국 라디오가 위안이 돼준다.성북구 종암동 이창수 씨의 엽서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열망하는 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어느 청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1980년 이창수 씨는 그녀에게 구애하며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를 신청했다. "당신이 지쳐 작게 느껴질 때 두 눈에 눈물 고일 때 내가 눈물을 닦아드릴게요. 당신이 잘 지내지 못하고 당신이 길에서 떠돌 때 나는 당신의 편이에요. 외로운 당신을 위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창수 씨는 사랑을 이루었을까. 험한 세상에서 그녀를 위해 다리가 되어주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준 적 있는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지하철에서 찍은 사진을 새댁에게 전송한다. 사진 속에서 아이가 손가락으로 V를 그려 보이고, 엄마는 공작새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다. "메르시 마마"라고 답장이 온다. 신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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