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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공부 어디까지 해봤니
입력 2019.04.01. 17:36 수정 2019.04.01. 17:59 댓글 0개‘시작이 반이다’는 말이 있다. 학교의 3월이 그렇다. 활동 중심 수업 과정 평가로 인하여 준비하고 챙겨야 할 요소들이 훨씬 많아졌다. 동교과 교사들간 협의회가 열리고 학교 전체 교육과정에 대한 설명 및 협의회도 많다. 생활지도에 있어서도 학생과 부모님과의 상담을 통하여 라포를 형성하고 소통하며 서로의 지향점을 확인하는 날들이기에 정신들이 없다. 체력에 과부하가 걸린다.
그렇게 3월은 교사만이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 다들 새로운 항해를 떠나며 준비하고 목표에 대한 도전과 의지를 다짐하기에 하루하루 설렘과 부담의 연속이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학급에서 비록 작심삼일이 될 지라도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주문(呪文)을 건다. 그렇게 새로운 환경 속에서 우리 아이들도 엄청 애쓰며 힘들게 3월을 건너왔다.
그런데 이렇게 애써 준비하는 진정한 공부(工夫)란 무엇인가? 아픈 4월을 맞이하며 또 가슴 먹먹한 숙제가 떠오른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여러 문제와 공존하지 못하고 동떨어진 지식 전수에 머문다면 그건 진짜 공부가 아니다. 현실 속에 투영되지 못하고 관념 속에 머문 지식은 허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3월 30일 자 경향신문 특집보도 중 혁신학교 졸업생 연대가 외쳤던 “1등만 끌고 가는 학교가 정상인가”라는 외침은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이제 우리 교육이 나아갈 방향과 지향점에서만큼은 혁신적 변화가 필요한 지점이다. 혹자는 말한다. 그것은 나중에 할 일이라고 입시라는 성벽 뒤로 숨어버린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전통적 학교교육 문제점에 대한 인식은 거의 모든 교육 구성원들이 동일하게 인식한다. 특히 간판 위주 입시문화를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것이 우리 자녀의 문제가 되는 순간 실타래는 얽히고설키고 만다.
물론 그러한 학부모의 태도를 탓할 이유는 없다. 현재의 시스템 속에서 자녀가 보다 좋은 직업 환경 속으로 진출하려면 점수에 매진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그것은 국가 정부의 책임이 크다. 교육의 변화가 필요한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전을 제시하고 설득해야 함에 소홀한 탓이다. 또한 입시와 평가의 공정성이라는 믿음은 관찰과 기록평가라는 새로운 변화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기록하고 평가하는 교사들을 믿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박제(剝製)된 지식 점수로만 미래를 준비할 것인가. 인성교육이 배제된 속에서 배출된 많은 지도자급 엘리트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중적 가면 상태를 많이 보고 있지 않은가? ‘모든 국민들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외침처럼 좀 더 좋은 정부를 가져야하지 않겠는가? 모든 것이 교육의 탓이다.
그렇다면 이제 변해야 한다. 변해야 한다고 인식한 만큼 우리 아이들의 공부 변화에 대하여 응원해 주셔야 한다. 지식 흡수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키우고 협업하고 소통하고 통합적 문제 해결력을 키워갈 수 있는 학습으로의 변화, 이것이 진짜 공부인 것이다.
그것을 철학에서는 토론 문답을 통하여 마음을 성장시키는 것, 통합적 조망 능력 곧 쉬놉시스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행히도 최근 많은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발맞추어 모든 구성원들이 그것이 진짜 교육이고 공부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방법은 입시에 적절하지 못하다고 비판을 재생산 해내는 사교육 담당자들의 펌프질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미래 4차 산업혁명 시대 역량과 맞지 않는 공부는 우리 아이들의 시행착오만 초래할 뿐이다. 그것은 대학 졸업 후 다른 대학으로의 편입, 자격증 획득을 위한 재교육 사례의 증가를 보면 알 수가 있다.
‘믿는 대로 보인다’는 말이 있다. 학교를, 교사들의 평가권을, 우리 아이들의 가능성을 모두가 믿어주셔야 한다. 기성세대가 보여주는 폐쇄적 엘리트주의의 극복, 더불어 살아가는 시민 사회의 구현, 나아가 통합적 문제 해결력을 가진 행복한 성인으로의 성장을 위해서도 말이다.
오늘도 공부에 애쓰는 우리 자녀들과 함께 묻는다. “공부 어디까지 해봤니?”
- <칼럼> 늘봄학교, 우리 아이들의 삶이 없다 '늘봄', 이 얼마나 예쁜 말인가? 봄처럼 포근하고 따사로움이 늘 함께한다는 뜻일 것 같은 '늘봄'. 그러나 이제 이 언어는 그렇게 쓰일 수가 없다.언어의 의미는 사회에서 규정된다. 아무리 좋은 언어라도 사회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언어의 오염이 시작되고 결국 그 언어는 이전의 의미로는 쓸 수 없게 된다. 나에게 '늘봄학교'은 '녹색성장'과 같이 그렇게 오염된 채 다가왔다.2024학년도 1학기 광주지역 늘봄학교, 신청에서부터 선정까지 학교 현장 갈등2월 현재 광주에서는 30여개 초등학교가 늘봄학교에 참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신청한 18개 학교 중 중17개교는 협의록이 없으며, 교장 결정 3개교, 교장과 교감이 함께 결정한 학교 1개교, 교장, 교감, 행정실장이 결정한 학교 2개교, 부장교사가 요청하여 승인한 학교 1개교 등 내가 속한 학교지만 어떻게 늘봄이신청되고 선정되었는지를 학교 구성원은 잘 모른다. 그래서 서로 의심하고 속상해한다. 이렇게 늘봄학교는 불필요한 학교 현장 갈등을 양산 시키고 있다.교사? 돌봄전담사? 일반직? 과도한 노동을 강요받고 있어"우리가 일 때문에 늘봄학교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늘봄학교 거부의 본질이 업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거겠지만, 노동자에게는 일도 중요하다. 여전히 시간제가 많은 돌봄전담사의 업무도 아니고, 수업과 생활교육이 고유 업무이자 이것만으로도 과도한 노동을 하는 교사의 업무는 더더욱 아니다. 늘봄지원실을 만들어 일반직을 배정한다는 것도 총액인건비제에 묶여있는 공무원 상황을 보면 실현 가능하지 의문이 들고, 기간제에게 맡기는 것 또한 노동의 불안정성을 부추김과 동시에 결국은 기간제 공고부터 선정 관리까지 다시 학교의 업무가 되는 것은 학교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안다. 학교의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한다. 본연의 업무가 아니라 강요받은 업무를 그것도 과도하게 말이다.가장 중요한 사실, 우리 아이들의 삶이 없는 '늘봄학교'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늘봄학교에는 우리 아이들의 삶이 없다는 것이다. 올해 초 늘봄학교에 대한 기사가 쏟아질 무렵 내 마음을 훅 치는 기사 하나가 있었다. 기사 중에는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자녀로부터 들은 초등돌봄교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엄마, 나는 초등학교 때 돌봄교실이 제일 싫었어. 다른 친구들은 학교 끝나면 엄마랑 만나서 놀이터에서 놀고 학원에 가고 집에서 쉬는데, 난 혼자 돌봄교실에 갔어. 나도 다른 애들처럼 엄마랑 만나고 싶었어." 우리 아이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아침 7시부터 밤 8시까지 학교에 있는 게 폭력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 안드는지? 어른들보고 그렇게 있으라고 한다면 아마 대다수 집에 간다고 하지 않을까?늘봄학교에는 주체인 우리 아이들의 목소리는 빠져있고, 즉 아이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대한 고민과 사유는 실종되었다.학교, 지자체, 무엇보다 보호자가 우리 아이를 충분히 돌볼 수 있도록필자도 아이를 돌봄교실에 보냈었고,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서 발을 동동거린 적이 있다. 대한민국 보호자들이라면 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두 번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때 절실하게 느낀 것이 돌봄의 사회적책임이었고, 학교 현장에 있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돌봄의 사회적 책임은 보호자의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보호자의 양육권을 보장하기 위한 적절한 노동시간 합의와 양육시간 확보도 해당될 것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것이 소위 '저녁 있는 삶'과 같은 것이다.학교가, 지자체가 함께 우리 아이들을 돌봄과 동시에 보호자가 우리 아이를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돌볼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천천히 가더라도 그렇게 가야 우리 아이들의 삶이, 우리들의 삶이 있다.그렇게 간다면 다시 '늘봄', 이 언어의 원래의 의미를 되찾아 진정 우리가 바라는 '늘봄'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정애숙 광주동산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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