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

<칼럼>학생이 주도한 3·1절. 그리고 광주학생독립운동

입력 2019.02.28. 17:36 수정 2019.02.28. 17:52 댓글 0개
한경국의 무등칼럼 무등일보 취재1본부

3·1절이 되면 함께 떠오르는 민족투쟁이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발생 후 딱 10년 뒤인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났다. 3·1절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억하는 이유는 닮아서다.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모두 학생들이 주도한 독립운동이다. 3·1운동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부터 비롯됐다. 당시 일본 유학생이었던 이광수, 최팔용, 김도연, 송계백 등이 주도해 적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송계백은 국내로 들어와 2·8독립선언서를 우리 민족대표에게 전달, 우리 민족에게 독립운동 불씨를 심어주기까지 했다. 학생들과 달리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던 어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독립운동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물론 국내적 배경도 잘 맞았다. 고종 황제가 일본에게 독살당해 서거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우리 민족의 울분이 목 끝까지 차오른 상황이었다. 이후부터 독립운동 전개는 급격하게 진행됐다. 육당 최남선과 만해 한용운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제작했고,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운동을 펼칠 날짜를 3월 1일로 정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다. 3·1운동이 계획된 당일, 집합 장소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장소를 파고다 공원에서 식당인 태화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변수는 또 한번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 계기가 됐다. 집합 장소가 옮겨진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일부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자신들만이라도 독립운동을 외치자고 마음을 모았다. 한 학생이 기미독립서를 읊조리자 다른 학생들은 준비해 온 태극기를 꺼내들었다.

이를 본 일본군이 총부리를 겨누고 군화발로 짓밟았지만 학생들은 끝까지 저항했다. 그 결과 저항도 못하던 어둠의 시대를 넘어 활발한 독립운동 시대가 열렸다.

광주학생독립운동도 비슷하게 흘러간다. 다만 다른 특징이 있다면 3·1운동은 서울 종로에서 전국 각지로 뻗어간 반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에서부터 시작 돼 서울은 물론 만주, 일본까지 확산됐다.

3·1운동 이후 독립 의지를 키워오던 학생들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조선여학생의 희롱사건을 보고 분노하고 저항했다. 나주역 사건 이후 불씨로 광주 학생들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칠 것을 결심했고, 11월 3일 광주에서 항일시위를 벌였다.

광주학생들의 독립운동에 감동한 어른들은 신간회·조선청년총동맹·조선학생전위동맹 등 사회·청년 단체들도 가세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후 독립운동이 한층 더 조직적으로 흘러가더니 전국적인 항일민족운동으로 발전, 5개월 동안 5만4천여 명이 참여했다.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모두 학생들이 주도한 민족 독립운동이다. 뿐만 아니라 3대 민족운동 중 하나로 꼽히는 6·10만세운동 역시 학생들이 중심이 됐다.

3·1절을 맞아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질문이 한가지 있다. 학생뿐만 아니라 이들을 가르치는 선생과 양육하는 부모도 생각해볼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기주의가 팽배한 교실에서 당신은 ‘우리’를 위해 어떤 마음으로 배우고, 가르치고 있는지를.

한경국기자 hkk42@srb.co.kr

# 이건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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