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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년과 여성]①"죽기를 각오했다"…여장부, 항일무장투쟁 선봉서다

입력 2019.02.21. 06:00 수정 2019.02.21. 06:10 댓글 0개
日 괴뢰국 만주국 하얼빈 거리에서
경찰 의심 피하려 초라한 행색으로
끝내 붙잡혔지만 단식 투쟁으로 석방
죽으며 "사람이 죽고 사는 건 정신 문제"
일본 총독 사이토마코토 암살 계획도
【서울=뉴시스】독립운동가 남자현(1872~1933). (제공=국가보훈처)

【서울=뉴시스】남빛나라 기자 = 1933년 2월27일 오후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최대 도시 하얼빈의 도외정양가 거리. 으슬으슬한 날씨에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이 오가는 가운데 모자를 눌러쓴 한 여인이 걷고 있었다. 다 해진 옷을 걸쳐 행색은 남루했지만 눈은 결기로 빛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경찰이 요란하게 호각을 불어댔다. 몇 차례 총성이 울린 뒤 경찰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 쓰러진 여인은 당황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의병 활동을 벌이다 전투 중 사망한 남편의 피 묻은 군복을 입은 채였다.

다가올 모진 고문을 훤히 알면서도 초연하게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이는 조선의 독립운동가 남자현(1872~1933)이었다.

만주에 파견된 일본전권대사 무토노부요시(武藤信義)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 지 한 달여 만에 거사를 치르려다 붙잡힌 것이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10대 후반의 소녀들이 혼례를 올렸던 시대상을 감안하면 증조할머니뻘인 나이였다.

그해 3월1일은 만주국 수립 첫돌이었다. 성대한 기념식에 참석 예정인 무토노부요시를 죽여 독립운동의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하는 게 남자현의 목표였다. 정해진 장소에 붉은 천이 휘날리면 무기가 든 상자를 건네받아 홀로 무토노부요시를 처단하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 배신을 했는지 무기를 받으러 가던 길에 일본 경찰이 급습해버렸다.

수감된 남자현은 곡기를 끊어버린다. 60대 노파가 고문과 단식으로 사경을 헤매자 일본 경찰은 부랴부랴 그를 석방했다.

오랫동안 추운 만주 지방에서 거친 독립운동을 해온 그의 몸은 끝내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의 사망을 전한 조선중앙일보의 당시 보도에 따르면 그는 "이미 죽기를 각오한 바다"라고 말했다.

【서울=뉴시스】'무등대장 모살범, 남자현(여) 遂 별세, 단식으로 극도로 쇠약한 결과, 22일 하얼빈에서'라는 제목의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27일 기사. (제공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는 죽기 전 식사를 권하는 가족에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에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아들과 손자에겐 중국돈 약 250원을 건네며 "이 중 200원은 조선이 독립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치고 남은 돈은 손자들을 교육하는 데 쓰라"고 당부했다. "독립은 정신이다"란 말도 남겼다.

무토노부요시 암살 계획은 그의 첫 의거가 아니었다. 기록마다 시기엔 다소 차이가 있지만 1926년께 그는 일본 총독 사이토마코토(齋藤實)를 죽이려고 했다. 사이토마코토는 사상교육과 선전을 통해 조선인을 일본 문화에 동화시키자는 문화통치를 내세운 인물이다. 문화통치는 3·1운동을 보고 화들짝 놀란 일본이 내세운 정책으로, 친일파를 육성하는 데 주력했다.

조선사회를 분열시키는 사이토마코토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남자현은 아들 김성삼에게 "나라가 없으면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 이 나라의 혼을 말살하는 이의 목숨을 끊어 조선을 부흥시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결심은 역설적이게도 또 다른 조선인의 암살 시도로 무산됐다.

일본인의 농기구 가게에서 일하던 송학선(1897~1927)이 1926년 4월28일 경성부회 평의원(京城府會評議員)들이 탄 차를 사이토마코토의 차로 오인하고 그 안으로 뛰어올라 평의원들을 살해했다. 이 때문에 사이토마코토의 경호가 강화, 남자현도 경찰의 감시 대상에 올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었다.

송학선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남자현은 세 차례 손가락을 자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20년대 만주에서 여러 갈래 독립단체들이 분열하자 그는 손가락을 잘라 통합을 호소했다. 1920년 8월29일 국치기념대회에서 왼손 엄지를 베어 그 피로 혈서를 써 읽었고 1922년 3월 독립군끼리 충돌하자 검지를 잘랐다.

또 60세를 맞은 1932년 9월19일, 하얼빈을 방문한 국제연맹조사단장 리튼에게 전달하기 위해 왼쪽 약지 두 마디를 잘라 '대한독립원' 이란 다섯 글자를 썼다.

당시 일본이 만주를 중국 침략의 군사 기지로 만들려고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자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셌다. 국제연맹은 이같은 비난 여론을 고려해 조사단을 현장에 파견했다.

남자현은 이 국제연맹조사단장에게 혈서를 전하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혈서를 썼다. 한 인력거꾼에게 돈을 주며 명주치마에 싼 혈서를 리튼 단장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일본 경찰의 검문에 걸려 실패했다.

▲참고자료: 이상국 <남자현 평전>(2018), 강윤정 <여성독립운동가 南慈賢의 항일투쟁>(2018),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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